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44)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나는 사상(思想)을 필연적 감성으로 표현함을 경멸한다. 사상이 각본에 의한 목적을 지향한다면 그건 사상의 깊이가 아니다. 단순히 먹이를 찾는 동물과 같다. 필연적 감성의 표현은 대결을 회피하려는 패배한 검투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우연에 얼마나 당황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닥쳐오는 우연의 파도는 거세다. 그로부터 나온 무의식적 감성으로 무장한 사상과 글이 아름답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이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모두를 이해시키려는 강박은 존재할 수도 없다. 또한 그렇게 이해되는 창조는 쓸모의 밖이다. 자기만의 사상은 끊임없는 타자와의 대결을 예고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상은 외로우며 거칠다. 또한 지속적으로 전투적이며 타협을 거부하는 고독한 방랑자일 거다. 결국 자기 안으로 침투한 사상은 스스로를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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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오위버멘쉬는 이렇게 탄생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깨어있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는 조건은 ‘나 자신’이다. 신앙이 필요하다면 나를 ‘영웅으로’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우렁찬 인간. 그러기 위해 스스로 명령하고 자신을 따르는 인간. 이 세계의 찬란함이라는 속임수를 무덤 속으로 과감히 지워버릴 수 있는 인간, 강한 내적 자유의지를 갖춘 인간, 침묵을 가르치고 그 침묵에서 수많은 사상과 심연의 깊이를 발굴하는 개척자, 온전한 나 자신의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벗어나지 않게 나의 그림자를 없애려는 인간, 기꺼이 말없는 나무가 되기를 유쾌하게 승낙하는 움직이지 않는 고립의 찬양자, 주관적 통찰 의지를 통한 자기 신앙과 믿음에 대해 욕심내는 인간 유형이다.” 먼 훗날 새로이 나타날 우리 자신들의 영웅이다.

이렇게 실천적 과제를 스스로 알아내는 네오위버멘쉬는 무의식의 의식을 존중한다. 그의 모습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미래의 인간형이다. 그리고 네오위버멘쉬는 무의식의 따라감과 의식적 벗어남을 통찰한 자이다. 탄생의 슬픔과 죽음의 기쁨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인간이다. 또 영혼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려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는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태어난다. 아울러 동물처럼 사는 자이며 자연의 숭고함을 밝혀낸다. 이로써 인간 특유의 권태와 허무함을 잊는다. 성인으로 살기도 하지만 자연을 숭배하는 바보이다. 이어서 동물적 본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위에 군림하는 인간 유형이다. 더불어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전진하려는 의지의 소유자다. 게다가 본능과 이성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놀이에서 자유로운 자다.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결정자는 ‘자기 자신뿐’이다. 그것은 가장 완성된 자기 성찰의 드러남이다. 자기를 밝히려는 자는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주관적 통찰로부터 세계를 그려 나간다. 그래서 살아감의 책임은 자신으로 향한다. 누구보다 자기에게 솔직한 자가 최고의 앎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인간 유형은 스스로를 유리처럼 여기며 끊임없이 닦아 내려한다. 지금 시대에 자기를 온전히 극복하는 인간유형은 넓은 바닷속 고래와 같다. 이 세상의 넓고 깊은 수많은 변화 속에 자신을 스스로 녹아내리게 하는 능력자다. 우리는 그들을 발견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 그들을 다행히도 발굴하는 데 쓰임이 있다. 그리고 자기 주관적 성찰로 철학을 탐구한다.

인간 질서를 확립했던 요인은 권력의 행사였다. 선과 악을 비롯한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다. 살아감의 강력함을 바탕으로 자기 권력으로 이용한 성취의 과정이었다. 그러한 과정이 쌓여 역사가 되었고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신념으로 우리는 설계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 뛰어난 인간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한다. 하지만 인간 세계의 질서를 합리적인 자발성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합리적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것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성이 분출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렇게 작동되는 인간섭리의 흐름을 알았다면 우리는 권력에 집착하는 것이 맞다.

자기 힘에 의한 권력이란 어쩌면 거대한 성과 같지 않을까. 따라서 누구도 나를 넘어서지 못하게 높은 이상과 깊은 통찰력을 장착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세속적이고 천박한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네오위버멘쉬의 권력은 단순하게 표현된다. ‘자기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밖엔 의미가 없다.’ 즉 내가 권력에 먹히면 존재이유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윤리·도덕이란 울타리에 깊숙이 학습되면 나는 소멸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가? 역사는 권력의 표현임과 동시에 인간질서의 기준으로 기억된다. 여기서 ‘세속적 천박한 권력’과 ‘자기 사상의 권력’은 분명히 다르다. 다양한 관점과 사상의 표현은 내가 가진 권력 감정과 반드시 함께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권력의 차이를 탐구해야 한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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