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유한 사상의 물결에 더 이상 배를 띄우지 않아야 한다. 자기의 사상을 붙잡고 놓치지 않는 우둔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대지위에서 네오위버멘쉬를 호명할 것이다. 그는 하늘 위로 외치고 대지 밑으로 밭을 간다. 하늘과 대지는 이 용감한 자에게 비와 새싹을 선사한다. 또 우연과 필연이 작동하지 않는 흘러감의 자연스러움을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은 소박하고 겸손하며 단순함으로 나아간다.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인간유형’을 말하는 표지는 무얼까?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시대의 고통’이었다. 무언가 말하고 표현하는데 역사를 만들어 보려는 갈바람 같은 인물이 많았다. 그들은 광기를 낳았고 갇혀 있었으나 ‘자기 자신’이었다.
새로운 역사를 보고자 한다면 살을 베는 고통이 엄습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것은 창의적 본능으로 표현하는 고상함을 입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 사랑실천으로 자연에서 비롯된 본능이다. 이에 따라 가장 높게 상승하는 기류를 타는 인간이 탄생한다. 미래의 네오위버멘쉬는 방랑의 길을 유쾌하게 여기는 유형이 되리라. 아울러 네오위버멘쉬는 겸손한 어울림을 실천하는 자이다. 즉 우정을 말한다. 정치적 행위가 갈등을 먹이로 한다면 살아있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생존은 우정과도 면밀히 대면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의 쾌락을 쓸모없음으로 소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우정으로 단결해야 한다. 반면 갈등의 최고점에서 비롯된 투박함과 물의 낭비는 목마름을 이어가게 하는 질투다. 우리의 사명은 사랑과 우정이 필요한 지점에서 회피의 문고리를 잡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과 우정을 먹이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피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아름다운 결투와 승패는 멀어진다.
다가올 네오위버멘쉬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이성이 성찰하는 비극의 시대를 보았다.”이는 비극적으로 자유를 타락으로 내 모는 상황이다. 자연스러운 감각은 사라지고 인위적 인공물이 창궐하는 비극의 시대다. 그러나 어느 지점이 되었든 자신의 어깨 위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높이 날아보고 넓게 생각하는 이성과 본능의 합작이 필요하다. 이는 반드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재료임을 알아야 한다. 그 알아챔은 분명 본능이 전달하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지위의 풀뿌리에 지나지 않다.
우리를 유혹하는 인간 본질·사랑, 협동을 저해하는 시나리오는 지극히 불행하다. 내가 악의적이라고 말하긴 부끄럽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갈등과 파괴의 영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사랑과 협동을 낳았다. 갈등이 표현되는 이야기는 알 수 없는 반죽 속 숙성과정이다. 세상의 알고리즘이 선(善)한 역동성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순진한 생각은 설득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화나게 하는 지금의 현실이 비극이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자연적이다. 즉 시간과 공간을 배제한 현실 속에 나타나는 나의 표현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내일을 살겠다는 무의식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그래서 찰나의 순간을 이해하는 어리석음이 필요하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고통을 선사받는다.
위버멘쉬는 자기 극복의 인간이었다. 또 대지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라 하였다. 이 삶을 무한 긍정하는 자유로운 인간형은 이미 출현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네오위버멘쉬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지금은 오지 않았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하는 세계와 같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 없이 많은 파도를 견뎌내는 이 역사적 정점에서 우리에게 잉태되리라. 그는 성장하고 있으며 구름 위에 떠 있는 자이다. 알아챘는가! 네오위버멘쉬는 우리들 중의 누구나이다. 그는‘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네오위버멘쉬가 되는 길은 종교적 우상과는 다르다. 우리가 아는 종교적 우상이라 함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 우상에 우리는 지쳐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영웅은 알 수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나타나고 때로는 사라지는 상상이 빚어낸 신기루와 같다. 그 신기루의 발현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네오위버멘쉬는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한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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