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41)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내가 꿈꾸는 세상과 나의 위치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과 부조리가 설명한다. 우리는 그러한 불가능과 부조리에 역심(逆心)을 품어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오위버멘쉬는 꿈꾸는 어리석음의 창조일 수밖에 없다. 그는 나에게 “창조하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라고”할 뿐이다. 그렇다! 창조도 만듦도 아니라면 “유일한 나를 말하겠다”라고 응수한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사상의 근거는 살아감에 대한 솔직함에 근거를 둬야 한다. 솔직함이 안기는 부담감은 자기를 넘어서려는 무엇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위험함을 견디는 자세이다. 이게 나를 설명한다는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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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극복한다는 의미는 스스로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경험적 사상이 자양분으로 작용돼야 하는 역동성을 수반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으로도 나타내게 하는 영웅적 서사이다. 하지만 영웅적 파노라마에 흥분한다면 자기 극복은 멀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영웅에 흥분할 경우 내면적 성찰보다 가시적 배설로만 표명된다. 단순히 보여지는 외적―소비하는 영웅―깃발에 응원하는 꼴이 된다. 이제는 나를 나에게로 돌려세우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다. 이렇게 나는 네오위버멘쉬를 불러오고 싶다. 이로써 인간의 소유욕 중에서 정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나를 오롯이 나에게로’ 귀속시키는 일이다. 즉 나의 존재를 일으키는 기특함이다.

이로부터 자기 내면과 끝없는 투쟁이 시작된다. 궁극적으로 나의 살아감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자세로 돌변이다. 비로소 자기 고통과 대결하는 의지를 발휘한다. 또한 이를 고르게 유지하는 의식적 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지의 항상성(恒常性)은 수도자의 수행 덕목과 일치한다. 수도자(修道者)는 필요한 것과 불필요함의 구분을 알리는 자이다. 이 세상 존재에 의한 탁월한 숭고함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로부터 영웅을 감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한 부류는 무심히 지나쳤던 이 세계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시대는 광장의 영웅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러한 영웅이 되고자 스스로를 버리는 행위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가 영웅적 이야기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광장의 영웅들이 나의 에너지를 앗아간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이제는 나의 방출된 에너지를 나에게로 돌려세워야 할 때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기만의 고유한 사상(思想)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야심(野心)을 채워 넣을 빈 영역을 만들어 간다. 텅 빈 공간을 확보한다는 위대함은 무심함과 냉정속의 온유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한 인간이 넓은 공간에서 춤추는 행위는 자기 극복을 넘어선다. 더불어 예술적 자질이 풍부한 꼬리표이며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행위이다. 계절이 바뀌거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영롱한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고 푸른 시선에 고정되리라. 그 시간이 도래하거나 반복되는 지점을 발견하는 이는 네오위버멘쉬의 영광을 가져가도 좋다. 그는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속’ 농부와도 같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데려간 전설이 말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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