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활동은 땀과 어울림을 사랑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이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념에 일종이다. 대지(大地)를 사랑하는 노동하는 인간의 본질은 경이로움이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신성한 존재를 의식하는 인간사유의 정점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자연의 숭고함으로부터 강해질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귀향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바탕으로 아름답다. 이는 곧 생성하는 정의로 나타나리라.
우리 인간이 가장 약한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세상이 두렵다는 증거다. 이는 내 의식 밖에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상과 모든 존재의 무심함을 내버려 두어라. 아무도 너의 놀이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힘없이 떠도는 나룻배가 왜? 자기 목적지에 도달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 그 나룻배는 스스로를 알기에 바다의 물결을 탓하지 않는다. 목적지는 나룻배가 닿는 곳이 해당된다. 더 이상 욕망하지도 않는다. 그 바다의 무심함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무엇을 얻고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꿈을 꾸어본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꾸어지는가? 상상은 우리의 능력이다. 그렇게 만족하는 우리의 능력은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조용한 거리에서 주변의 소리가 말한다. 꿈은 조용한 상상으로 키워가는 소리로 작동한다. 이윽고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은 너의 의지로 정오(正午)가 될 것이다. 너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그때가 비로써 자연과 하나가 된다.
생존 본능과 대의(大義)에 대한 결의는 자기를 속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나를 속임으로써 양심적 책임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생존 적 투쟁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이는 사실상 너무나 당연한 사상이며 기쁨일 뿐이다. 또한 나를 기만하는 행위는 타자를 향한 야만적 행동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생존투쟁과 결의는 나로 거듭나는 계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자기와 대중의 의미는 새로운 국면으로 해석되는 차이점이 발생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대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고귀함이다. 반면 대중으로의 침투는 나를 끌어안아 주려는 시도를 무시하는 행위다. 삶의 결단과 책임은 고독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중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은 나의 의식적 벗어남이다. 이로써 대중 속 고독한 사상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인간이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가?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대중을 만들어 왔다. 대중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소멸해 가며 얻는 게 평화와 안전이다. 하지만 이는 곧 권태를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윽고 오래 견디지 못하는 나락을 맛보았다. 인간의 기억력은 무한 축척이 안 되는 행운으로 오늘을 갈구한다. 그 누가 목적을 매 순간 되물으며 살겠는가? 이처럼 쓸모없는 에너지를 방출하는 우둔함도 없다. 대중 속에서 궁극적인 삶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냉정하고 엄격한 지축(地軸)-인간 삶의 엄격함-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웃고 떠드는 세속적 쾌락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향한 무심함에 대처하는 용기가 있는가? 게으름이 선사하는 편안함이며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는 가장 곤혹스러운 실험을 동반한다. 사실은 내가 더 무심한 지경에 이르러있다. 그래서 애써 외부조건을 들먹거리는 행위는 부당한 저항일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를 향해 아무리 내가 사랑한다고 한들 바위의 침묵에 나는 굴복된다.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무심함에 굴복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연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결과이다. 자연은 이제 반동적 사상이 돼 버렸다. 그리고 자연은 어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있다. 불행히도 자연은 인간을 버리는 중이다.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