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던지는 질문은 실천적 표현을 요구한다. 적절한 표현은 올바른 정신을 연마하는 재료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를 드러내는 과정 속에 배태(胚胎)되어 있다. 드러내는 삶은 욕구(慾求)와 욕망(慾望)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과도 같다. 현실적 살아감의 ‘여기 없음’을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전투다. 전투적 살아감에서 철학하기 위해선 고통을 경험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고통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애써 이해하자. 그러한 실천은 살아감의 책임이다. 삶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철학의 실천이다. 게다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기는 철학을 요구받는다. 철학의 단순화는 나를 찾는 숨은그림 찾기의 연속이다. 살아감의 중간중간 자신을 잃어버린 삶은 무의미한 선택이다. 분명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데’란 느낌을 받을 때가 찾아온다. 그때가 바로 자신을 올바르게 소유할 수 있는 시기다. 이윽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시기가 온다. 그때 비로소 인생 전환점을 돈 것이다. 즉 나를 알았다는 인식이므로 스스로 기뻐할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삶은 지속적으로 전진만 하지 않는다. 삶이 끊임없이 전진하리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의 반복적 살아감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다. 허무와 권태를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삶이다. 이 같은 세계의 냉혹한 질서의 순환은 자연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실존에서 명확한 사실은 인식의 주체는 생각하는 내 자신이다. 그래서 신의 존재라는 믿음에서 벗어날 때, 내가 보인다. 말하자면 나의 살아감이 신을 포함한 타자에 의한 삶이 전부가 돼서는 곤란하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신이 결정한 삶이 가장 최선의 길이다. 더불어 나만의 사상을 갖는다는 행운은 내가 세상에게 겁내지 않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따라서 한 번쯤, 짓누르는 여론과 전통 도덕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살아감은 연습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실전이다. 오늘도 힘들지만 내일도 힘든 게 삶이다. 우리는 이미 마련된 관습이나 도덕을 비판할 필요도 있다. 여기에 더해 문득 다가온 의구심에 대해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또한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미리 가본 죽음의 인식은 모든 걸 없음으로 돌려놓는 발상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없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없음이 의미하는 바와 다시 시작이란,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그러므로 스스로 다가옴에 대해 열려 있는 가능성을 희망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삶으로부터 깨달은 경우이다.
인간은 자기 힘에 의한 성취감으로 행복을 살짝 느끼는 동물이다. 그래서 미완성의 완성을 위해 분투(奮鬪)한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능력은 완전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게 인간은 지속적인 미완성의 운명 안에 기거(起居)한다.
긴 역사 속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발명품에 의해 행동이 달라졌다. 자연적 게으름에서 부지런한 인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러면서 웃고 떠들고 시간을 숭배한다. 시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인간은 오늘도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무의식적 따라감의 족쇄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시간을 숭배하지 않았다면 죽음에 대한 의미를 무엇으로 말하겠는가? 또 다른 뭔가를 발명하고 숭배하지 않았겠는가. 아~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진보하며 스스로 괴로워하는 영장(令狀)으로 성장하였다. 흐뭇한 건, 인간은 신의 영역 아래서 포만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고 신을 의심하는 부류가 많아진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써 자기를 인식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신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제껏 굳은 신념이 허구였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이유를 뭐라 말해야 하는가? 내가 믿는 바가 진리라는 포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것 또한 순진한 생각이다. 이제 진리에 대한 오염을 더 이상 가두려 들지 말라. 말하자면 진리는 모든 게 흘러간다는 순리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 물처럼 맑아지는 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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