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드리워진 실존의 감각은 어쩌면 지루함으로부터 도약 거리가 많다. 흔히 그림자라 부르는 허상을 보노라면 현실의 권태로움에 구속되어 있는 것과 같다. 살아감의 권태를 종종 실감하는 이 세계를 느끼는가? 이렇게 세상 밖을 내다보려는 의지의 결여된 현상을 알아야 한다. 한편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자는 다르다. 드러남을 찾아 나서야 함을 실험하는 자이다. 그곳으로부터 나의 존재함은 드러나고 밝혀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윽고 자신으로부터 나온 사상의 물결은 나의 존재를 밝히는 과정으로 진입한다. 그래야만 오롯이 나를 데려오는 성과를 얻을 것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사상은 겸손함을 바탕으로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이로써 수고로움이 동반되는 사상의 물결은 지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할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 생각함의 주체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타인의 생각이 아닌 자기 생각으로 산다는 것이 본질적 ‘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체적 살아감의 반항을 삶이 끝날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사람들은 ‘비극’을 보면서 몰래 기뻐한다.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면 나의 안전을 찬양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적인 슬픔을 안고 있을 때, 타인의 비웃음을 참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어보지 못할 감정의 투명함이다. 허나 나에게 남아 있는 연민과 동정이 있다면 타인의 비극에 잠시 동화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로 그칠 뿐이다. 우리는 비극에서 희열을 느끼는 동물이다. 반면 타인의 기쁨과 행복해하는 모습에 우리는 어떤가? 우리 가슴속 악마가 외쳐 댄다. 마음속 불편한 양심을 애써 억누르지 않는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가면에 가려지고 또 버려진 양심으로부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한다. 세속적인 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감은 극복해야 할 과제가 풍부하다. 그 가운데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알아채는 능력이다. 또한 타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는 마음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다움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사태를 바로 보는 인간다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현실적으로 역심(逆心)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내가 가지려는 물질적 욕심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얻으려는 욕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얻으려는 욕심 없음이 타락한 자질이다. 또 빈약하고 나약하기에 욕심이 없다. 나아가 나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욕심이며 자기 발전이다. 악마 같은 치졸함도 순수한 감정의 일부이거늘, 나를 속이지 않는 마음이다. 이렇게 오히려 나를 밝혀내려는 의지는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용기다. 이로써 부끄러움을 용납한다. 더불어 진정으로 자유라는 욕망을 얻어낸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필요하다. 이어서 나의 실존과 밀접하게 교류하는 현명함을 획득한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는 나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결심이다. 이러한 발상은 밖으로 내던져진 자신을 돌아오게 할 계기이다. 이윽고 스스로 귀향(歸鄕)―존재를 밝혀 나에게로 돌아옴―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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