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29)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인간은 내면의 속삭임과 함께 살아간다. 내면의 양심이 주는 선물은 억압이다. 이렇게 내 안에 도사리는 또 다른 자아와 대결하는 인간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비극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내면과 타협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우리다. 알다시피 살아감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이다. 이로부터 살아감은 자기극복의 연속성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인간은 학습한 이 세계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시도한다. 그다음 독립을 꿈꾸는 단계로 진입한다. 독립 의지는 세상으로부터 위로의 빚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세계와 사상을 추구하고 살아야 한다. 나의 강력한 살아감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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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 무리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무의식적 따라감의 족쇄에서 지속적인 부채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거대한 사회적 틈바구니에 얽매이며 ‘자기 안락’을 숭배하는 우리들이다. 반항하는 내적(內的) 이상이 강한 사람은 군중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는 홀로 자기를 돌보는 강인함을 유지한다. 실제로 대중의 힘은 어떨 땐 큰 힘으로 작용한다. 허나 무질서가 무리 집단을 형성할 때 위험에 노출된다. 통제되지 않는 무리는 소용돌이의 흑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것이 대중이 휘몰아치는 토네이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광활한 대지에 내몰려 홀로 걸을 때, 그 강인함이 발휘된다. 그러나 개별적 나약함의 두려움은 군무를 조장하고 유희로 나타난다. 그래서 조작된 인간 세계의 질서에 끌려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조작적 인간 질서 속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그래야 나를 알고 자신이 된다. 이러한 의식적 벗어남의 발아(發芽)는 가장 깊숙한 성찰에서 나온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무리 본능이 우리를 얼마나 약화시키는지. 현실적으로 거대 정보를 앞세운 집단의 우둔함을 알아채야 한다. 그 깨달음으로 나를 강하게 연마하는 고독의 기술을 가져오라.

인간은 희극과 비극을 경험하고 희열과 슬픔을 느낀다. 유일하게 인간의 얼굴은 표정이 있다. 살펴보면 직접적인 연결 고리에서 벗어난 비극적 사실이 존재한다. 이렇게 외부적 비극으로부터 악마적인 기쁨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사실에 우리의 내면은 기쁨을 생산하고 외면적 슬픔에 동조한다. 악의적이게도 비극은 희극으로의 개화다. 이같이 희극의 탄생은 비극 속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의 태어남은 희극적 현상은 아니다. 모든 것이 비극에서 비롯된 불가항력을 인정할 때다. 그로 인해 새로운 시대로 전환은 물론 역사의 길은 달라졌다. 이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결론적으로 비극은 희극으로 승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 세계는 비극의 진화를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보라! 비극을 접하면서 배설하는 희열을 느끼지 않는가? 이같이 인간의 살아감은 희극 속에 비극이 있다. 아울러 비극 속에 희극이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인간 역사는 비극과 함께 쾌락 추구를 지향했다. 그러한 쾌락 추구의 상승에 따른 비극의 탄생은 당연하다. 동시에 인간에게 타락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이유가 있다. 쾌락은 자기 삶을 스스로 속이기 위한 마약과도 같기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을 쾌락 추구는 자기를 스스로 버리는 행위다. 나를 밖으로 던지는 것과 동시에 고통을 잊기 위한 방편이다. 쾌락을 얻기 위한 고통은 같은 맥락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살아감은 고통과 쾌락의 동질성과 합의한다. 이것이 자유가 선사한 타락이다. 그리고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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