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는 타자의 의지로도 확인된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에게 거울이다. 그리고 허약한 동물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또 나를 의식함으로써 존재한다. 더 나아가 존재의 자유를 말하자면 이렇다.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시작이다. 그다음 타자와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로써 존재를 구명(究明)하게 된다. 밝혀진 존재는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한다. 어떻게 보면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듯 비존재의 실존이다. 우리 인식밖에 있는 준비 상태다. 따라서 존재의 자유는 나와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타자에 의한 밝혀짐을 포함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에게 세상은 없다. 그래서 실존은 내가 느끼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이어서 세상을 심각(心覺)하게 느껴야 할 책임감이 필요하다. 결국 자유의 획득은 나와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물론 자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에서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란 허무함을 배제한 나를 오롯이 느끼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나 스스로 느끼는 감정은 나의 의지로 표현된다. 유일하게 발현되는 나의 의지로 세계는 내게로 다가온다. 그 외의 실존적 사실은 나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보는 관점의 시선은 마음으로 침투하게 마련이다. 그 마음이 표출되는 감정이 내가 바라보는 세계이다. 인식범위를 넓혀보면,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인식된다. 존재감의 인식은 감각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의 느낌이라는 표현을 빌리자.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나타나지 않는 존재감을 내포한다. 이 영역을 가져오는 유일한 동물은 느낌을 인식하는 사람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존재를 밝혀야 할 책임이 따른다. 인간에게 존재의 슬픔과 또는 기쁨이 따른다. 설명되지 않는 실체적 나의 있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의 영역인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설명되지도 않는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마치 신의 영역과도 같다.
존재의 확인은 권력적 산물이다.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인간실존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최고의 의지가 반영된 권력 감정이기도 하다. 이 같은 감정은 감각적인 느낌을 넘어선다. 반면 찾아 나섬의 경험은 존재 확인의 실적이다. 이러한 실존의지는 최고의 물리적 작용에 의해서 산출된다. 앞서 말했듯 알 수 없는 영역은 남아 있다. 존재자를 넘어 존재란 관념의 영역이다. 존재란 신을 만든 사람들이, 만들어진 신과 동질성의 어울림을 유발한다. 따라서 그들이 얘기하는 신과 동격인 인간을 정의 내리는 것은 우둔한 생각이다. 신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아무도 모를 다가옴을 살기 때문이다. 이렇듯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나에게 인식되거나 창조된다. 새로운 인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결과이다. 그것은 모든 감정과 의지로부터 나타난다. 예컨대 슬픔, 기쁨, 고통, 경이로움 등이 존재자의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라는 안개는 밝혀지지 않는다. 사람이 그렇다. 또한 유일하게 사람만이 자기 존재를 밝히는 의지를 갖는다. 이와 더불어 인간은 신과 같은 존재라는 우격다짐을 펼치기도 한다.
다음으로 신의 영역을 희망하는 인간이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를 희망하는 이유는 무얼까? 불편한 진실을 갈구하는 욕망이다. 또 지금이 말해주고 있는 부자유가 이를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현실을 알아채는 순간이‘자유의 부재’를 증명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물을 때 자유는 시작된다. 또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인식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유롭다 할 것이다.‘자기’로 산다는 것! 나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연애질이다. 어느 날 문뜩 삶이 지친다고 느낄 때가 다가온다. 그 이유는 나를 선택할 수 없는 ‘자유 없는 자유’의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을 포착하지 못하는 나는 자유를 얻기 힘들다. 단지 이 현실을 살뿐이다. 현실 속 살아감은 이성적 움직임이 아닐 거다. 따라서 자신을 낮추려는 비루함에서 벗어나야 내가 보인다. 그리고 무의식적 따라감에서 의식적 벗어남의 욕망을 얻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러한 자유의 의미를 필요치 않을 수 있다. 그의 현재가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유를 느끼는 부류는 무언가? 여기서 같은 인간 종(種)에 속하더라도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굳이 정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 세계는 소수의 지배세력과 다수의 피지배자로 분류되었다. 이처럼 인간 세계는 소수의 쓸모 있음과, 다수의 쓸모없음으로 나눠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불행하게도 다수의 피지배자는 생각하지 않는 부류로 남을 것이다. 그들은 지배자의 지휘봉에 의한 구성원일 뿐이다. 이어서 나로 존재할 수 없는 지배받는 사람일 뿐이다. 자유를 필요치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존재라는 명제를 찾아가는 길은 대중 속 담론에서 찾기 힘들다. 그러한 아늑한 분위기에서 나의 존재를 데려오기 어렵다. 설령 찾아진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는 우리를 구속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존재를 찾겠다는 의지의 발휘는 이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다르게 산다. 또 삶의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 있음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함을 알 뿐이다. 설령 세상사의 속임이 난발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자기표현으로 정당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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