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강력해질수록-의지의 발휘-바라보는 세계는 넓고 다양함을 맞이한다. 나의 강력함은 살아감의 유쾌함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스스로 존재함을 알아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존재를 밝혀낸다. 이렇게 삶을 강하게 하는 의지는 시야를 넓히는 자기표현이다. 아울러 미래의 두려움이 매 순간 다가오는 것을 견디는 자세이다. 그래서 궁극의 현상을 궁금해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철학’이 나오는 순간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철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철학의 기본적 요건은 질문을 던지고 찾아 나섬을 실천하는 자세이다. 철학적 사명감은 자기 존재를 밝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학을 신봉하는 이 세상의 펼침에 맞서 본래적 자기-미래를 여는-를 데려오는 책임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적 사고를 추앙하는 지난 역사의 철학으로부터 본래적 존재를 데려오는 무거운 책임이다. 즉 일상적 살아감으로부터 잃어버린 자신을 데려오는 과정이다. 이어서 본래적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삶을 책임지는 우리는 동물과 다른 사고력으로 이 세상과 대면한다. 인간이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앞으로 나아감에 대한 기대를 품는 동물이다. 끊임없이 뭔가를 기대하고 이루려는 가능성을 배태(胚胎)하고 있는 동물이다. 그러한 살아감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다. 책임 있는 생각은 나의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배설하는 행위다. 이로써 삶을 강력히 만들려는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막사는 자’ 일뿐이다. 보라! 우리 앞에 지나간 일과 지금하고 있는 일이 있다. 또 미래가 가져다 줄 그 무엇이 놓여있다. 나답게 존재하기 위해서는‘항상 용감해’ 지는 일이다. 비록 나약하고 게으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동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곳이 많다. 그 중심에는 어둠에 갇힌 동굴 속 나의 정신세계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살아감에 의미는 여기 있음을 넘어섬에 있다. 인간이 항상 꿈꾸는 이상(理想)이다. 여기 있음을 알고 나의 수평선을 인식한다. 그다음이 넘어섬이 될 것이다. 어느 순간 수평선의 넘어섬을 알아갈 때가 온다. 그때가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시기이다. 나아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다름을 표현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으면서 조금만 더 넘어섬과 찾아봄을 실천해야 한다. 그곳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반드시 존재한다. 살다 보면 우리의 머무르는 흔적은 남지만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겠다는 용기는 희망이라는 지독한 망상과 혼합된다. 따라서 위험하게 사는 용기가 필요한 게 사람이다.
보자! 강력한 삶의 방식은 무엇을 낳는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기품으로 나타날 수 있다. 기품의 무겁고 강하다는 의미는 외부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자세다. 이러한 자세는 쉽게 자기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험하게 사는 방식과 견디는 용기를 수반한다. 이렇게 살아감의 뜻을 스스로 밝혀보는 자세가 나를 살게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때론 진지해질 때다. 명심해야 할 건, 너무 자주 진지함에 노출되면 곤란하다. 장기간의 멈춤은 고인 물처럼 썩어갈 수 있다. 바라건 데, 정체성이 고인 물처럼 멈춰버리는 어리석은 환상은 불필요하다. 나에게 닥쳐오는 매 순간의 쉽지 않은 살아감이 놓여있다. 이는 새로운 물이 흐르듯 청량한 생각거리와 동반돼야 한다.
궁극적으로 살아감의 강력함은 무거운 중심을 잡는 것이다. 그 중심은 어떠한 외부적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함을 나타낸다. 현실적 안락함과 이데올로기, 특히 물질적 영향으로 나를 이끌지 않는다. 그러한 경지에 오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타는 사람에겐 다가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를 외부 조건의 영향아래 두는 행위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따라서 항상 자기 기분을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집착거리를 털어내는 일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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