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事實)은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는 현상이다. 자연계의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현실을 말한다. 사실은 인간이 자연을 제대로 보는 선물이다. 인간세계에서도 사실을 논하고 받아들이면 미래의 설계도가 보인다. 사실은 과거의 산물이며 지금을 바라보는 척도이다. 그다음 미래의 창이 넓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적 가치에 중심을 두는 사고는 자신과 세계를 동등하게 보는 시각이다. 그다음 비틀기를 시도하는 자가 돼야 한다. 설령 두려움이 지속되더라도 미래를 탐구하는 ‘찾아 나섬’은 비틀기의 연속이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간다. 서사적(敍事的)이다. 순수한 사실적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다르다. 어떻게 내 자신이 존재하는지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가는 데 익숙해진다. 아울러 세상의 지평을 넓히는 데 전문가적 소질을 보이게 된다. 이제 삶의 목적이 무엇이라 질문하지 말라. 그 목적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산다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 부여는 스스로 나를 가둔다. 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될 일은,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목적은 이 안에 존재한다.
앞서 인간은 스스로 질문하는 동물이라 했다. 인간은 스스로 역사가 되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바라본다. 이게 삶이 주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이다. 아울러 지나감을 유쾌한 역사로 기억에 잡아 두어야 한다. 그다음 현재의 여기 있음을 즐겨야한다. 이는 다가옴의 미래를 설렘으로 채워야할 흥분거리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현실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는 실시간 책임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이와 함께 염려하는 의식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 세계로 던지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되리라는 기대를 속여가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이 순간, 나에게 주는 선물은 아픔이다. 아파하는 고통은 쾌락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렇게 차갑고 냉혹한 지배적 공기는 비극적이다.
지나간 종교적 믿음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진실을 거부한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의심의 시대로 진입했다. 다가올 시대를 과거의 맹목적 교조주의(敎條主義)의 굴레에 맡기면 안 된다. 미래를 겨냥한 화살은 의심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아직은 새로움이 충격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직 관념에만 머물 뿐이다. 지금까지 어떠한 투명함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력은 무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발상은 인간이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오만함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여기 그렇게 있음’뿐이다. 다가옴의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지나간 과거의 찌꺼기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사라지는 중이다. 다행이도 지나감의 과거와 다가옴의 미래가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사태가 현재를 좌우하는 사람살이로 거듭난다. 그리고 오직 오늘을 살아갈 의무감에 충만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감이 나에게 사명으로 인식되도록 이끌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다가옴에 대한 책임감이 솟아오르는 기상을 갖는다. 그래서 나에게 인식된 시간에 대한 굴레를 애써 버려야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통찰은 전체를 관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여기를 의심하겠다는 욕망은 자기를 데려오려는 자이다. 그는 주체적이며 존재의 밝힘을 갈망한다. 이윽고 자기욕망의 주인이 되다보면 나에게 집중하는 현상이 발견된다. 서서히 나에게 통찰이 다가오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시간 없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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