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감, 여기 있음, 다가옴을 통찰하는 능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사색의 허용을 용납하는 영리함이다. 또 통찰하는 역량은 사유의 기본을 구조적으로 그려 보는 자세이다. 전체 또는 전체성의 의미는 사물 자체가 아니다. 서로의 관계성으로부터 객체의 자기 조절과 변형이 낳은 결과이다. 이어서 생각하기의 완성은 그 시간에 비례한다. 마치 산을 오르는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사유의 정점은 끈질긴 지구력으로부터 정상에 오른다. 이내 통찰의 정점에서 나를 발견하는 행운이 따른다. 내 안에 존재하는 참 자기를 발견할 때가 온다. 대상을 두루 살펴보는 진지한 사유를 통해 통찰의 기회는 시나브로 다가온다. 이같이 통찰은 인내와 견디는 삶으로부터 획득 가능하다. 이와 달리 통찰의 기회를 외면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각 없음과 진보하지 않는 행동이다. 그것은 자기 연민(憐愍)으로부터 외면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자신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자신 스스로를 데려와야 하는 사명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찰은 자기로의 침투에서 생산되는 배설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념을 배출하기에 앞서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관념을 주입하는 과정이 우선시 돼야 한다. 말하자면 나의 고유한 사상을 품고 나에게 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기로의 침투를 감행하는 특이함이다. 이로써 서로 교차하는 통찰은 밝음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힘이다. 알다시피 세계는 양태로 이루어져 있다. 즉 두 요소가 결합돼야 한다. 이렇게 자연적 통합의 사실이 존재한다. 이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양태로 기생한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보살피며 살아간다. 양면의 절대법칙과 모호함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모호함을 견디는 통찰은 최고의 사상으로 올라간다. 이로 인해 낮과 밤을 통합하는 명(明)을 주어 담는다. 나에게 다가오는 고뇌의 삭힘과 통찰의 배설 행위이다. 이러한 배설로 인해 나는 해방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자유를 향한 내적성과이다.
고뇌는 배설물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강력한 자기 소화 능력으로 정기적 배설은 또 다른 채움으로 풍부해진다. 우리 안에 도사리는 지저분한 생각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꼬리를 물듯이 이어가겠는가? 그러한 생각이 들 때면, 그러한 생각을 소화시키는 내공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집착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저분한 사유거리를 덜어내고 덜어낼 필요가 있다. 이로써 나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한다는 것. 이러한 자유정신의 획득을‘의식적 벗어남’이라 하겠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서서 드넓은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과 같다. 이곳에서는 굳이 언어로 표현할 이유가 없다. 자유정신은 표현하지 않을 숭고함으로 나타난다. 숭고함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진리를 말할 이유가 없다. 진리는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게끔 유도한다. 진리란 그저‘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감춰진 진리를 알아내는 탁월함은 모호함을 견디는 자에게 보여 진다. 진리는 마치 번개의 빛처럼 순간적인 드러남일 뿐이다. <다음 주에 계속>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