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12)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이유는 존재론적 관점이다. 현실적 살아감의 비관적 희망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무참히 던져진 삶을 이어 가게 하는 선언이다. 그래서 지극한 연민은 오로지 자기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다음 사랑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야 자기희생의 몫을 과감히 자기에게로 집중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고 살았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라! 이 시대의 거대 담론에 흘러가는 무의식적 살아감의 혜택이 있다. 이를 기대하면서 무심히 나를 세상 흐름에 맡겨 버린다.

광명시청_메인중앙하단_260824
안성시청_바우덕이축제_메인 하단_260908

그래서 일반적 인식은 대중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방식으로 학습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홀로 있음을 알고 즐기는 자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 주제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를 통합하고 궁리하는 인간 존재의 탐구이다.

살아감에는 지나감의 후회 내지는 아쉬움이 자리한다. 또 여기 있음의 고통과 쾌락이 상존한다. 그다음 지속적인 다가옴의 기대와 불안함은 우리들의 철학이다. 여기에 인간이 사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지금도 변하고 있으며 새롭게 도전하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의식하는 능력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은 끊임없이 진보 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갈망은 목마름에 대한 갈증 해소라는 해결책이다. 미완의 해결책을 찾아 인간이 자기의식을 확보한다. 즐거움이다. 그것은 자기 욕망으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집중력의 선물이다.

지나간 인간 의식 과정의 6,000년 세월이 있었다. 그동안 인간을 인간답게 설정한 요인은 ‘생각하기’였다. 이와 함께 의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윽고 본능적 자아의 이중적 고찰은 지혜를 선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우월함을 창조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빈약했다. 그 사랑의 결핍은 자연을 바라보는 나약한 시선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보금자리를 훼손시켰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세계를 재단하고 탐색했다. 아울러 모든 것을 이념에 의한 가치로 둔갑시키는 바보짓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인간의 진보적 가치의 우월함은 강해졌다. 그 혜택도 상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인간 스스로 소외-의미가 사라진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도구를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 진보의 폭주 기관차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를 역동적 삶이라고 명명하면서 지금을 살고 있다.

이에 더해 종교적 갈등을 빙자한 파괴와 살생은 우습기도 하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다. 실체가 없는 종교를 위해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이 얼마나 살아감의 촉발을 실체 없는 외부 세계로 몰아넣는 욕심인가 말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생각은 이어진다. 자연의 파괴와 죽음은 현실화된 지 오래다. 자연을 원초적 시대로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살아감의 가능성을 인간 스스로 약화시키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살아감은 파괴와 죽음이 우세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보존과 통합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다음 주에 계속>

수원특례시의회_08 (265x118)
260623_인천도시공사

저작권자 © 중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관련 기사

0개의 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