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10)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위버멘쉬보다 우월한 그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無)로 향한 허무함의 강력함을 소멸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살아감의 강력함을 조장하는 일이다. 강력함은 무를 향한 질주이며 자신을 데려오는 연민이다. 우리는 소멸하지만 우주 속 생성과 소멸은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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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의무 엇은 나 자신 밖에 존재한다. 나로부터 무엇을 데려와야 한다. 이러한 책임하에 상실된 세계로부터 이끌게 하는 의지력은 무엇인가? 여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치가 있다. 이를 자기 극복으로 소멸시키는 힘을 얻어야 한다. 강력한 자기 권력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는 없음의 무구한 체념으로부터 발견된다. 새로운 체념은 자기 상실을 회복하는 시작이다. 그리고 자기 힘의 발휘가 시작된다. 이러한 자기 극복의 증거를 가지고 새로운 위버멘쉬를 창조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존재를 데려올 참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새로운 힘을 가진 권력자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여기서 현재를 아파하는 감성이 개입되는 지점이다. 여기를 아파해 본다는 건, 느끼는 감수성이 탁월하다는 말이다. 사랑스럽게도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파해 본다는 건, 인간에게 너무나 축복된 선물이다. 이는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우리는 느낌으로 살고 그것을 나누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높이만큼 살아감에 유용한 것도 없다. 정신적으로 즐기는 자는 최고의 신선(神仙)이다. 이를 근거로 살아감의 정당성을 살짝이라도 말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서로 아파하고 기뻐하는 ‘공감(共感) 능력’이 아닐까! 공감의 역할은-인간 진화가 우리에게 명령하는-삶을 책임지는 표현이다. 표현으로 이어진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의 교감은 운명적 살아감의 의지로 밝혀진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이 나를 밝혀냄과 동시에 자연이 말하는 여기 있음이 나를 밝혀낸다. 이제 나를 드러내게 하는 사랑스러운 발동(發動)이 꿈틀댄다.

빈약한 표현이지만, 인간이 행복을 갈구하는 가련함이 있다. 행복 추구는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추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동물에 더 가까운 본능으로 산다. 그럼에도 이성적 억지 주장에 학습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행복이라는 조건을 너무 높게 세우는 우둔함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져 보면 본능적 감성이 표출되는 지점은 즐거운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위버멘쉬보다 우월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적 감성을 표현하는 자이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행복의 조건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동물의 본능적 유전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행복은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절대적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는 능력은 무의식적 따라감의 탈피다. 그 지점에서 자신으로 돌아오는 전환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이유로 행복을 거대 담론의 기준에서 찾으면 안 된다.

자기를 버리는 바보는 맹목적 사고력이 뛰어난 자이다. 하지만 자기를 인식하는 자는 표현이 다르다. 위버멘쉬보다 더 나은 이상(理想)을 갖는다. 또한 새로움을 아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본능적 감성에 충실하자는 말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능성을 열어 놓자는 뜻이다. 아울러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행(移行)하는 삶으로의 도약이다. 또한 자연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살아감이다. 이러한 살아감은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유의 본질을 알고 타락으로부터 자기를 데려오는 수행자이다. 이것이 내가 밝히려는 네오위버멘쉬에 의한 자연으로의 귀향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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