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마치며 3)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우리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졌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 살아감의 서판(書板)은 깔아져 있었다. 이러한 운명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려내며 살아간다. 또한 운명적으로 우리는 국가의 큰 틀과 사회적 틈바구니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거대 담론에 의해 지금을 우리는 무의식적 따라감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설령 자기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당신이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안다. 내가 나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거대한 흐름에 종속돼 있는지. 이 거대한 흐름에 길들여진 우리의 실존(實存)은 약화되었다. 지금을 사는 실존적 양심은 거대 담론을 거부하지 못하는 양상으로 굳혀졌다. 따라서 자기 밖의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어서 순한 양처럼 살아감이 최선이라 여기게 된다. 다만 이 세계 내에서만 의욕하고 살뿐, 그 이상을 꿈꾸는 행위는 위험하다고 스스로 경고한다. 불행히도 이런 삶이 마치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충실한 무의식적 살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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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방관하지 않아야 할 일은 주변에 많다. 그중에 살아감에 대한 질문은 나의 실존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지금을 질문해 보는 자세이다. 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과학의 진보로 문명과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현재를 풍요롭게―편리함으로―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인간의 정신적 빈곤함이 가중된다고들 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두루 알만한 사실이다. 흔히 얘기하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각자 현재를 살아가면서 부지불식(不知不息) 간에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거다.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 삶이 전진하는 도약으로부터 경직되는 기이한 현상을 곰곰이 살펴보자는 뜻이다.

익명(匿名) 성이 난무하는 대도시의 분주함. 이와 어울려 우리들의 소외감이 가중되는 현대사회의 분위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삶의 차가움으로부터 잠시 온기를 가져올 필요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나 자신을 오롯이 밝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대중 속 익명성으로부터 잃어버린 자기 존재를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무(無)로부터 시작하는 자연으로의 회귀는 또 다른‘나’의 발견이다. 우리가 자연의 경이로움과 동화되는 삶을 추구한다면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자리 잡게 된다. 굳이 시간의 관념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살아감은 그 자체로 살아감으로 남는다. 그러한 전제조건이라 함이, 우리의 문명과 문화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싹튼다. 이러한 시도는 그동안 나를 구속시켰던 문화와 문명의 틀에서 자연으로의 복귀를 예고한다.

나에게 속임과 속임수를 남발하지 않는 환경으로의 ‘귀향’이다. 이는 곧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그곳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로부터 시작이다. 이러한 없음을 경험하는 경이로움은 우리들을 다시 한번 살게 하는 역동성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감이 원래 없음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걸 안다면, 다시 한번 ‘또 다른 새로움과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러한 희망찬 기대를 품으며 살아야 할 책임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이 표현하는 삶의 방식에서 궁극의 정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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