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의 욕망이 존재한다. 알아야 한다는 무거운 부조리의 연속성. 그것은 지나감, 여기 있음, 다가옴의 책임이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일하게 인식하는 동물이다. 아울러 완벽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것. 다만 살아감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인식은 태어나는 순간으로부터 과거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현재가 바로 미래로 이어진다. 이를 반복으로 연결된다. 살아감 속, 미세한 연결 부분을 이어 가는 충동은 우리의 양식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인식하는 영원함의 부재는 여기 있음과 다가옴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연결 부분이 지금이다. 이 순간이 살아감의 단순함을 포착하는 순발력이다. 지나감과 여기 있음, 다가옴에 대한 책임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분석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이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분석하려는 의지가 강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한 능력을 키워 갈 때, 미세한 연결에 대한 열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 효과는 다가옴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시킨다.
실존과 권력으로부터 나는 불안과 염려로 전진하는 인간인가? 현실적 삶에서의 강력한 도구는 무엇인가? 실존의 강한 의지로부터 나오는 힘의 축척인가? 현재를 제대로 분석해 보려는 세속적 인간은 권력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반면 세속적 벗어남을 잉태하려는 자는 다르다. 자신에게 의식적 벗어남을 도모하려는 사기를 친다. 산다는 것! 지나감, 여기 있음, 다가옴을 인식하고 통합하는 삶? 뭐라고? 보자! 뒤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사람이다.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가야 된다는 의무감! 하지만 벗어남은 창조적 정신에서만 나온다. 그것이 의식적 벗어남의 시작이다. 이렇게 신(神)이라는 벗을 상실한 허무주의자가 탄생한다. 이런 게 벗을 버리고 홀로 서 보겠다는 강력함을 나타내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은 자신을 절벽에 세우는 일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살펴보자. 신이라고 칭하는 절대자가 있다. 유일하게 자기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인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지나감, 여기 있음, 다가옴을 동시에 인식하는 자다. 높고 깊은 사람이다. 절대적 자기를 원하는 인간 실존이다. 이윽고 인간의 ‘자기 사랑’으로 승화된다. 궁극적으로 ‘신’보다 자기가 우선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명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자기희생’은 가장 추악하다.
자기희생은 자기 소멸을 위한 발명품이다. 자기희생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사랑 행위를 할 수 있는 ‘절대적 자기를 계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신적인 존재의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 절벽으로 향하는 마음은 이렇다. 나를 타락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마지막 다짐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걸어 보려는 모험이 아름답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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