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이 필요하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려는 여우 같은 교활함이다. 뭐라고? 보자! 이론이란 사회현상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한다. 이론은 개념을 이용하여 수행되는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다. 과학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론을 세우는 것은 과학 연구의 주요한 목표이다. 하지만 이론을 경시하고 그때그때 무계획적인 실천을 수행하면 안 된다. 그릇된 실천은 벽에 부딪치게 되며 나아가서는 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의 내용에 비교해 항상 더욱 풍부하다. 이러한 현실의 구체적이고 전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주의해야 할 건, 이론을 기계적으로 실천에 적용하면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지게 된다. 이론은 우리를 구속시키는 달콤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가 찾아 나섬을 추구하는 목적은 이것이다. 이론의 쓸모를 전적으로 필요치 않는 사람이 돼야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건, 이론의 맹목적 신뢰에서 비틀기를 시도해 보자는 뜻이다. 그래야 내가 나를 본다. 돌아보라! 학교는 우리에게 사람을 가르치지 않았다. 교육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배우게 하는 데 있다. 그 바탕에는 인문적 고전이 자리해야 한다. 인문적 고전 말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인문 고전이 우리에겐 절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가와 학교는 이론을 앞세워 일꾼을 찍어 내는 공장으로 성장하였다. 지금의 대중은 사람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대신 향기로운 ‘자본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그 잔에 술을 따르고 기도한다. 여기서 국가 사회에서 품어 대는 거대담론에 휘말리는 우리들을 발견한다. 이 같은 소용돌이는 과학 이론이 만들어 놓은 무의식적 따라감의 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그 신앙 속 안락을 향해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이 지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파괴적 사상은 무엇인가? 통찰력이 무엇인가? 순간을 멈추게 하는 통찰력의 획득이 가능한가? 언젠가는 나에게 알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앞서간 선지자들의 깨달음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기다린다는 연속에서 자기 성찰을 끌어오기도 하였다. 지나감과 여기 있음, 다가옴의 파괴적 사상은 나를 여기에서 볼 줄 아는 자이다. 그래서 인문적 고전을 접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현실을 사는 실존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현실파괴자다. 더구나 스스로 몰락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그 시대를 아파했다. 더불어 역사 속사상의 탐구자였다는 사실이다. 즉 나에게 달려드는 현실을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인문 고전이 말하고 싶은 웅변이다. 이러한 웅변은 인간의 자격을 갖추고자 했던 지나간 사상가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건네는 연민이다.
생각의 깊이는 머무르는 지점과 의지로부터 파고든다. 이때가 인간이 성숙되는 순간이다. 더불어 지나감과 여기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인간 사유의 과거란, 절망, 미소, 역사, 감각, 배설, 타락, 천박함, 후회, 사라짐, 욕심이다. 이러한 다름을 통합하는 능력은 통찰을 전제하는 능동적 소화력이 필요하다. 능동적 소모란 자기가 지향하는 바를 밀고 나가는 능력이다. 사유의 현재란, 권태, 허무함, 고통, 쾌락, 불안, 욕망, 연애, 살아감, 저항, 반항이다. 이러한 사유의 직접적 효과는 마음 근력의 훈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목적을 위한 수행 과정이 필요하다. 사유의 수련은 살아감의 토대이며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사유의 미래란, 희망, 기대, 고독, 구름, 염려, 안개, 지평선, 하늘, 욕망, 느낌, 사랑, 모름, 있음, 없음, 새로움이다. 이러한 다가옴에 대한 사유를 끌어내는 이유는 자신을 데려오는 발판이다. 그러기 위해 다가옴에 맞서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다가옴을 박차고 나아간다는 의미는 하늘과 대지의 움직임과 같이한다. 이 또한 자연스러움과 동반이다. 살아감의 변화이며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다. 자연스럽다고! 자연스러움은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 가능성이다. 그래서 열려 있는 가능성은 존재가 나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순수한 존재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여기서 우리의 치부(恥部)를 과감히 들춰내는 이유가 있다. 오염된 자기를 씻어 내는 반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써 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지금 시대를 보노라면 덮어지는 현상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머뭇거리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현상이다. 이렇게 나를 무참히 버릴 수 있는 건가? 아니다! 버려진 나를 데려와야 한다. 더 나아가 반항하는 정신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던져진 나를 데려오자. 시대적으로 나를 위한 구애(求愛)의 손이 필요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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