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2)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인간의 자격을 갖추는 사상적 탁월함. 지극히 살아감의 책임감을 느끼는 발상이다. 또 세상 보는 시야를 구조적으로 탐구하는 사고력의 창출이다. 구조적 탐구는 지나감과 여기를 살피는 일이다. 아울러 다가옴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만들어 내는 살아감이다. 이는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의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말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사유(思惟)의 진보가 축척된다. 더불어 경험의 세상 밖으로 나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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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생각거리에 노출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식의 펼침이자 살아가는 그 자체다. 그로부터 삶에 당위성의 확보는 가능해진다. 이윽고 깨어 있음은 물론, 무의식적 따라감이 주는 허무함의 의심이 시작된다. 그 의심스러운 주체는 내 자신이며 변화와 생성을 바라는 의지이다.

이제부터 기존 사상으로부터 질문을 가져와야 한다. 말하자면 역사로부터 이어 온 우리의 살아감에 대해, 질문에 답하면서 산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지나감과 여기 있음 다가옴에 대한 교량이 된다는 의미는 질문에 따른다. 그러한 질문 속에 나의 존재를 밝혀 보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는 시간이라는 연결과 연속성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또 감각적으로 지나감과 여기 있음을 포함한 다가옴을 알아채는 순발력이다. 따라서 연속성은 실존-나를 드러내는 과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섬이 될 것이다. 또한 서로 연결된다는 다가섬의 의미는 하나로 창조된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실적 세계는 인간이 살아야 하는 지침으로 다가온다. 이를 ‘관계 맺음’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관계 맺음은 대중 속으로 침투하는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나로 돌아온다는 뜻과 아울러, 나와의 대결의 시작이다. 궁극적으로 관계 맺음의 실체는 ‘나’를 독립시킨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저 멀리 던져진 나를 찾는 과정이다.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이제부터 잃어버린 나를 데려오는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는 현재를 뭐라 할까? 순수하게 살아감의 의미와 재미를 연구하는 시점이다. 이것을 살아감을 평가하는 여기 있음으로 말할 수 있을까? 현재 인식은 인간이 갖는 실존적 가치를 생산하는 창조 정신인가? 우둔하게도 시간이라는 관념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 많은 시간적 창조를 단행했다. 시간이라는 관념을 버릴 수 없는 사고는 목적론적이다. 그래서 창조하는 정신을 고양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이 시간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의 고도로 발달한 세상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있을 뿐으로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극히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재미를 만끽하는 실존적 존재 말이다.

여기에 있는 그대로인 실존은 시간과의 대결일 수 있다. 따져 보면 “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산다.”고 말하면 ‘시간을 산다.’는 명제만 남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시간을 발명하고 스스로 구속됐다. 이로써 미래에 대한 불안은 시간의 폭력에 노출된다. 유한성이 주는 강력한 시간 감옥이다. 또 현재는 계획과 실천을 전제로 하는 삶이 전부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꿈들은 현실을 이루기 위한 발버둥과도 같다. 여기서 나타나는 발버둥의 의미는 전쟁과도 같은 생존 경쟁으로 발전한다. 살펴보면 현재를 누가 살고 있는가가 중요할지도 모른다. 또 누가 오래 남아 있는가도 중요하다. 인간의 비참함과 굴욕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다. 알겠는가! 불행히도 인간은 살아져야 하는 운명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면 굴욕이라 말할까. 인류는 이러한 필연을 느끼는 운명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진화를 거듭한 결과 살아감을 고민하는 인간이 되고만 것이다. 자연에서 나왔지만 자연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존재가 인간 아니겠는가? 본능적 감각을 애써 퇴화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이성적 인간이다. 이것이 이성적 인류의 ‘시간 감옥’이 낳은 진보였다.

시간에 의한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어떻게 존재 가능성을 열어 놓는가? 사유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인식하는 인간! 그래서 살아감의 실체를 탐구해야 한다. 그에 따라 나를 오롯이 발견하는 지점은 고독의 발견이다. 이는 단순히 여기 있다는 사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반드시 ‘나’라는 존재를 알아야 하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래서 존재로 달려가는 나를 밝혀야겠다. 이제 버려진 나의 존재를 데려오려 한다. 그리고 현재를 호흡한다. 당신에게 어느 날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이 올 것이다. 도둑처럼 침입하는 정신을 일깨우는 번개 소리. 도둑-나의 정신을 훔치는-이 말하는 “지금을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때가 비로소 잃어버린 당신을 데려올 준비를 시작한다. 비록 이 순간이 당신을 모르도록 유혹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너의 의지는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때 너의 비극을 사랑하게 될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 운명의 비극은 새로울 게 없었다. 인간은 불행하게도 시간을 살았을 때부터 비극이었다. 그다음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희극에 도취된 역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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