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본능에 의한 권력 감정을 드러내는 야수로 산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현재에서 가장 내밀하게 아는 동물이다. 물론 스스로를 포착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윽고 가장 슬프고도 기쁘게 다가오는 실존이다. 그러한 자신을 반기는 순간이 온다. 선악을 비켜간 자기 힘의 성취로 기쁨을 누리는 비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난다. 굳이 사는 방식이 옳아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름지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허나 인정받기 위함이 쓸모없음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러한 발견은 ‘나를 사는 것이나’ 이기에 가능하다.
인간의 쓸모는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임과 동시에 살아 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쓸모는 오로지 나만이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타자에 의해 평가되는 건 슬픔과 동시에 비루함이다. 다만 서로가 어울려 찾아 나서는 열정의 고리를 만들 뿐이다. 그래야 인간의 본질적 탐구는 사라진다. 이어서 인간 본질을 찾을 이유가 없어진다.
또한 인간 본질을 애써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도구가 아니라 고유한 자기 생각으로 사는 동물이기에 그렇다. 인간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게 인간이라는 작품이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 역사의 세계를 따져 보면, 가장비참한 노예의 삶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삶은 지속되었다. 역사 속 노예의 살아감은 고통스런 희망으로 가득한 비루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인류는 역사를 기록했다. 지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인류 역사에 쓰여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영광스럽게 우리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인간 역사는 다시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살고 있다. 이 무심한 세상을 견디면서 말이다.
여기서 무심한 인간 역사를 되짚어 보자. 인간은 600만 년 전, 침팬지와 분리돼 진화를 거듭했다. 그로부터 문명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6000년의 짧은 기간이 있다. 이와 같은 짧은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본능이 우세한 동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월을 두고도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뒤로한 채 이성적 동물이라 자부한다. 더불어 시간으로 분리된 과거, 현재, 미래의 사고력을 지녔다. 시간을 살면서 지난 역사의 깨달은 사상가들은 인류의 ‘사해(四海)동포주의’를 공통적으로 말했다. 이에 합당한 우리의 변명은 인류의 원초적 뿌리는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뿌리는 ‘같음’으로 출발했다. 여기서 지향해야 하는 질문이 발아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수천 년이 흐른 뒤에 바라본 철학의 다짐은 이렇게 표현된다. 인간은 서로 ‘같음’이라는 존재 안에 있는 운명이었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속삭임의 실체는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남고 싶은 원초적 본성이다. 지나간 2500년 전부터 내려온 사상가들의 공통된 고민은 서로 ‘사랑’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재미와 놀이를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본능적 사랑을 버리게 되었다. 오늘날 불완전한 이성적 가면은 오늘을 사는 인간 동물에게는 어색하기에 그지없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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