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알 수 없는 무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 동물과 달리 세계를 인식하는 현실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기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열려 있는 현 세계를 밝히려는 의지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나의 살아감의 책임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지금까지 밖으로 던져진 삶을 되돌리는 ‘귀향’을 꿈꾸어본다. 이것이 나에게 묻는 현재의 설움이다. 이로써 스스로에게 달려드는 미래의 책임을 밝히려 한다. 미래의 책임 사상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찾아 나섬에’ 있다. 찾아 나섬에 대한 나의 각오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 있음으로써 지나감과 다가옴의 무거운 교량(較量)의 중심에 서 있다. 나는 현재 올바르게 여기 있는 걸까? 매 순간의 선택이 교량의 1인칭-주체적 자각-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나 자신은 대중 속 주변인의 비루함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래서 인식하는 ‘자기’로 격상시키려는 의지는 무얼까?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한다. 때론 이 무대에서 주인공이 아니라는 현실적 도피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주인공은 하나라는 엄격함에 굴복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교량의 역할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는 1인칭인 나와의 직접적 대면이 필요하다. 즉 나와의 끊임없는 대결의 연속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량의 역할은 양면을 비교하여 따져보자는 말이다. 교량의 위치는 뒤로도 앞으로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교량이란 지나감과 여기 다가옴의 전체다. 이로써 시간성의 연결에 존재하는 나의 역할이 발휘된다. 물론 교량은 표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표현은‘나의 책임에 따른 결심으로’ 이어진다.
모든 행위가 현재를 사는 교량이라 할까? 우리는 이세계속 관계의 복잡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대중이라는 연결망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지금은 개별적 존재를 들어내지 않는 것이 대중 속 일반화다. 하지만 자유로움이 표현되는 지점은 거대 담론에 저항하는 의도에서 발아된다. 반면 개인적 안위(安位)가 우선시 되면 대중으로부터 탈출하기 어렵다. 그에 따라 자유라는 표현은 약화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대중은 어리석어진다. 이윽고 대중 속 정치는 영웅을 갈망한다. 그 결과 거대한 대중의 갈등을 먹고사는 이들이 많아졌다. 알다시피 대중적 인간은 과학을 앞세워 자연을 스스로 소외시켰다. 그리고 과학을 숭배하게 되었다. 게다가 대중은 우상을 만들어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중이다. 그로부터 우리 자신도 불안과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여기서 지나감과 다가옴의 현실을 질문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위버멘쉬를 능가하는 ‘네오위버멘쉬’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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