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14)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사람이 산다는 것은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 사람은 이로써 사람다움이다. 살아감의 실천을 완수해야 하는 지금일 수밖에 없는 인간. 이러한 운동의 의미는 사람으로 던져진 책임이다.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이자 고통이다. 사유하는 인간은 독립을 원하고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갖는다. 따라서 항상 자기를 넘어 그 다음 무언가를 추구하는 동물로 진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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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화의 결과는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끼도록 유도되었다. 나아가 허무함이 반복되는 불운을 맛본다. 이같이 사회적 동물로 진화된 대가(代價)를 치르는 중이다. 이어서 거역할 수 없는 허무함의 유전적 도래는 숙명으로도 작용된다. 이러한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속이고 위안거리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종교와 철학이 대표적이다. 종교와 철학을 넘어선 오롯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담금질을 향한 쇳덩이다. 그래서 자기 극복은 더욱 단단하고 변화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이는 자기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려는 자기를 향한 채찍이다.

인간은 이 같은 갈망을 추구하는 이유를 자기 삶의 유한성으로부터 터득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반드시 도래하는 삶의 끝을 의식하는 동물이다. 스스로를 밝혀내려는 의지는 앞으로 다가오는 자기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살펴보자! 자기 한계를 인식하지 않았다면 생각하는 자체가무의미할지 모른다. 생각이라는 능력이 주어진 이유는 아마도 자기 종말의 분투임에 다름 아니다. 자기와의 대결은 지금의 안절부절 못함이 스스로를 일깨운다. 이윽고 여기 있음의 허무함을 발견하고 다름을 찾아 실행하기에 이른다. 실로 찾아 나섬은 나를 나에게로 데려오는 시발(始發)이다. 궁극적으로 내게로 향한 다가감이다. 이렇게 살아감은 나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과정의 연속성에 놓여 있다. 이는 내가 현실을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다.

이와 함께 거대한 삶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진입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빛나는 삶을 휘두르는 역동성을 갖게 된다. 또한 살아감이 창조되는 각성(覺城)이라 하겠다. 이러한 삶은 유한성에서 오는 긴박함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한 대응은 망치를 휘두르는 나의 내면적 표현으로 적절하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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