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적 상념(想念)이 세속적 가치기준일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는 비도덕주의자다. 기존의 선과 악을 넘어 관습에서 멀어진 존재이다. 가장 타락하기 쉬운 것이 가치기준을 갖는 엄격함이다. 그 이유는 얽매이는 살아감은 타락을 조장하는 발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목민적인 자유로움이 탑재되지 않는 인간은 타락을 맛보아야 살아진다. 유목적인 아닌 정착민이 살아가는 방식인 지금이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 정착민의 가치에 얽매이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나를 속이는 행위는 지금을 아프게 한다. 아마도 현재를‘무의식적 따라감’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실존-의 존재, 있음과 없음을 통합하는 화두(話頭)는 무언가?
엄격하게도 우리는 시간을 살고 공간을 거닐며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실존적 가치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 거대한 공간에서 의문을 품은 질문은 질문다운가? 아니면 그 공간 안에서의 사고는 제한돼야 옳은가? 이 세계의 가치를 발산하는 본질적 파악은 미약한 화두다. 거대 담론(談論) 속 단조로운 쓰임새의 본질은 사람을 도구로만 표시한다. 나아가 인간이 생각하는 척도가 가치 중심적으로 정착한 사태를 말한다. 도구에서 탈피하여 그 이상을 알아내야 하는 인간이다. 가치척도의 산물은 슬픔이다. 가치척도는 인간과 노예라는 명료한 이분법으로 세계를 지배해 버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끝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관념을 낳고 있다. 그러한 심연을 애써 파고드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간의 뇌의 구조는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지고 설계되어 왔다.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그 설계됨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의 연속이다. 따라서 자신이고자 하는 본능적 나아감은 더 높은 삶을 희망한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라는 지점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전락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이란 영원히 돌고 돌아갈 거대한 움직임으로만 작용한다. 이러한 엄격한 자연적 흐름에 나의 존재는 작아진다. 작아진다는 것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냥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은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의 움직임은 필히 자연적이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 인간세계에 반드시 존재한다.
시간이라는 엄밀함에 노출된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무의식적 두려움인가? 시간 속에 밝혀지려는 존재는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한 존재는 시간에 구속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애써 목적이라는 관념을 왜? 가지고 있는 걸까? 이 위협적인 공간과 무심한 시간관념의 강제력. 그러나 우리가 제기하는 세상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은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래도 삶과 이 세계의 궁금증에 대한 갈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삶의 의문에 대한 궁극의 질문은 허상(虛像) 일 수 있다. 그 또한 우리가 밀고 나가야 하는 불편한 행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주는 고통에도 질문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실존은 물론이거니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행위 중에 최악은 나에게 말 걸지 않는 “나”이다. 나에게도 관심 없는 나는, 존재의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나를 버리는 변명으로‘세상이 나를 버렸다’한다. 그럼에도 삶에 대해 질문을 갖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강조하거니와 인간 실존의 책임은 척박함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질문을 갖는 이들은, 세상을 두려움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항상 새치기를 감행한다.
우주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그냥 흐름’은 아닐까? 인간이 아무리 궁극적 답을 갈구하더라도 응답에 대한 만족은 없다. 이 같은 사실에 기초하면 ‘그냥 흐름’이란 웃을 일이 아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운명 앞에 놓인 사건 말이다. 한편으로 이성적 동물인 인간만이 우연에 심각함을 주입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동물들을 보라! 그냥 흐름이란 자연환경에, 자신을 적응하고 산다. 그들로부터 어디에서도 불만이라는 동심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지 마련된 환경-있는 그대로-에 맞설 뿐이다. 그렇게 동물들은 시간이 필요치 않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성적 사고를 이어받은 인간은 다르다. 우연적 사건에 대해 합리적 대응능력을 겸비해야 하는 불운도 갖고 있다. 우연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윽고 끝없는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생각하는 인간의 숙명(宿命)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도 우연에 반항하는가? 이 또한 자연스러운 반항과 저항으로 간주한다면 답은 쉬울 수 있다. 다가옴에 대한 모호함이 주는 두려움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미완성의 두려움에 노출되어 있다. 미완성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은 없다. “나는 완성이고 너는 미완성이야”를 외치는 게 인간이다. 이렇게 외쳐대는 우리 세계의 안타까움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슬픈 정적이 감돈다. 이 세계가 선사하는 비정함에 고통이라는 어길 수 없는 받아들임. 억지로 필연에 의한 삶만 산다고 치면 너무나 메마른 상상일까. 미래의 불안은 오히려 정신적 바로 섬을 주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따로 있다. 운명적 새로움의 길을 열어놓는 염려와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이라 칭하는 인간의 논리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세계의 모든 현상을‘그저 흐름에 일부임’을 각성하는 자세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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