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양분된 사고는 늘 선택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그 선택에 희생되고 결심을 요구받는다. 지금도 어느 하나의 선택이 나의 삶으로 표현된다. 아울러 스스로 평가하고 아파한다. 그래서 고뇌는 아름다운 배설 행위다. 이러한 행위는 무의식에서 깨어나는 의식적 벗어남의 발버둥이다. 우리가 애써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번개처럼 관점의 영역은 다양해진다. 그러한 때가 오고야 만다. 관점의 세계는 여기에서 공간을 넓혀가고 또 다른 큰 원에 진입한다. 관점의 다양함은 세계의 숨어있는 존재를 탐색하는 여행이 된다. 그래서 인간의 사유가 얼마나 기쁨으로 다가오는지 말할 필요는 없다. 자기의 고유한 생각거리로 찾아 나섬을 실행할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는 행운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우리의 살아감의 의지가 활발하고 광범위하다면, 내가 아는 세계는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달려드는 존재의 물음에 응답하리라. 살아감의 책임에 따른 보상이다. 이윽고 이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우연과 필연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비로소 순전히 나의 의지의 발동만이 유일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힘의 작용에 의한 변화가 나에게 선사하는 행복의 순간이다.
아무리 나를 속이려 한들 정숙(貞淑)함은 저 밖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의 소란스러움은 비겁하다. 그 정숙함을 유혹하더라도 소용없다. 야속하게도 흐르는 물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어김없이 또 다른 사상을 요구받는다. 아~ 이러한 요구에 지쳐가는 살아감. 그래서 나를 고귀하게 하는 방법은 침묵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 오래간다. 아무튼 현재가 여기를 보이게 하는 기준이 존재한다. 지금은 그 현재가 무거운 중력 이상으로 느껴지고 있다. 역시 수고로움이 동반되지 않는 가벼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게 가벼움이 아니다. 끊임없이 덜어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벼워지는 일이다. 생각하기가 던지는 또 다른 버림이며 가벼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아가는 이상을 확보하고 ‘자유정신’을 얻는다.
이제 자유정신이 말하는 바를 데려오라.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는 영역. 그러한 영역에서 거대담론과 물질에 현혹되지 않아야 가볍다. 그 가벼움은 맑음을 유도하는 토대가 된다.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지금 무의식적 따라감의 무게에서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사람의 기억이 쌓일 때를 생각해 보면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버리기라는 가벼움의 물리적 현상은 무언가? 망각하는 소화력이다. 과거를 그것도 씁쓸한 기억을 버리는 습관도 중요하다. 가벼워지는가? 그렇다! 가벼워지는 건 생각의 깊이만큼 버리는 요령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숙함이 따라오는 것이다. 망각이라는 소화력이 주는 효과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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