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26)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소수가 다수의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다수가 구속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지배자가 다수의 피지배자에게 행하는 일은 교육이란 명목의 학습이다. 우리는 학습에 의해 정신적·육체적 구속을 당하고 있다. 거대 권력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이 무의식적 따라감을 계획하고 조장하는 지배자의 음모이다. 그래서 집단적 사고는 이기적인 방향이 우세하다. 집단을 벗어난 자유를 향한 이상적 삶의 방향은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자유라는 근성(根性)을 밝혀내려는 의지는 내 자신의 표현으로만 실현된다. 나의 세계는 나의 의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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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시 공동체로부터 사회적 동물로 진화되었다. 불완전한 이성적 비극이 탄생하는 시기로 진입된 시기다. 차츰 사회화되면서 개별적 삶의 욕망이 약화되어 갔다. 거대한 사회적 틈바구니에서 주어진 삶의 욕망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자기 삶의 욕망에서 멀어진 존재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개별적 기질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거대 담론에 포섭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두터운 울타리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다. 여기서 도대체‘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지 않는가? 더불어 이 시대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 시대를 관찰하고 문제를 포착하는 순발력이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한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다가올 ‘나로 돌아옴’을 향한다. 이는 그러기 위한 언표를 허용한 인식적 성과다. 지금 흐릿하게 인식하고픈 결정적 단서는 무엇인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살아가는 조건이 존재한다. 그것은 표류이다. 표류하는 가운데 절실함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확정되지 않는 것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나 자신’이다. 그것이 궁극적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정글에서 버티기엔 너무 약하고 게으르다.

이 물음에 답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본질에 속한다. 그 본질에 의문을 갖는가? 이제는 누구라도 물음에 대한 답을 굳이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 이유는 내가 갖는 물음에 답이란 이렇다. 외부 세계가 담당하는 불행이 연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인간 본질의 기능을 넘어서는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 존재자 기능의 본질을 넘어 존재의 무궁함을 찾아 나서야 한다. 거기엔 궁극적 응답은 없다고 가정하면서 말이다. 그 불행을 인식하는 자만이 인간을 파괴하고 자연과 화해하는 길잡이로 나설 것이다. 스스로 파괴하는 자는 스스로 다시 성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제 알겠는가! 나를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사악하고 고립시키는 행위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을 말하는 우리는 생각을 향유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오직 나에게로 돌아오려는 시도만이 나의 욕망의 주인이다.

비록 가장 불행한 인간이라도 거세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자기 자신’이다. 자기를 스스로 거세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한 다짐은 자기 영역의 판도라를 소유하는 지구력으로 나타난다. 그는 누구도 열어볼 수 없는 비밀의 상자를 간직한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가장 실존적 위대함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궁극적으로 살아감에 던져진 실존을 견뎌야 하는 숙명과 함께한다. 따라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자기만의‘영역 하나쯤’은 소유해야 한다. 그 이유는 어떠한 비판이 가해지더라도, 나의 변명으로 당위성을 확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인간언어의 모순이 얼마나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차이점의 무수함이다. 더구나 타자와 나의 구별 없이 언어가 모두 이해될 수 있고 전부 공감이 형성되는가? 난해한 인간언어의 세계는 변명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도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도구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말이다. 이 언어의 맹점을 쉽게 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말이 많은 세상에는 그만큼 오해와 언어의 피곤함이 가중된다. 하물며 언어에도 계급이 나눠져 있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언어부터, 숨 쉬기조차 힘든 격자 언어를 말로 표현한다.

언어의 난맥을 풀어보기보다 차라리 침묵이 최선의 방책이다.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언어도 없었을 것이다. 상상해 보라. 오직 몸의 움직임으로 소통하는 인간과 동물의 세계가 어떻게 이뤄졌겠는가? 아름다운 초원과 들판에서 서로 어울리는 자연적 형태의 삶이 그려지는가? 아마도 여기 있음의 존재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이 펼쳐졌을 일이다. 지금까지 인간언어가 표현되는 긍정과 부정의 다양함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언어의 쇠사슬이다. 언어의 세계는 더욱 정신을 무겁게 유지한다. 이제는 각성이 필요하다. 성인(聖人)으로 가는 길은 여기에 있다. 사람의 언어와 말의 속성을 알았다면 ‘침묵’도 아름답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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