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 세계를 해석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뿐이다. 그러면 순수한 객관적·자연발생적 사실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있는 그대로 말이다. 생성과 소멸만 있는 그러한 세계. 인간에 의해 해석하고 편집되지 않은 그대로다. 그것이 내가 꿈꾸고 돌아가고자 하는 ‘고향’이다. 하지만 비극적 해석이 낳은 결과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각자의 해석이 우리가 보는 지금 현재의 파괴물이다. 또 미래에 대한 비극이다. 그럼에도 실존적 가치는 스스로 여기 있음이다. 우리는 여기 있음에 더욱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당신의 여기 있음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진리 추구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 현실적 사실에 대한 깊은 사고력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산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사유의 자세다.
인간의 발과 생각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곳이 있다. 그곳엔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있음일 뿐이며, 흐르는 물과 같다. 그곳엔 변화되고 생성·소멸하는 현상만이 나타날 뿐이다. 우연히 나타나는가, 만들어졌는가. 지구라는 행성은 우연의 산물인가? 하지만 인간은 지구 영역 전반에 걸쳐 닦달하고 요청하는 어리석음을 지향했다. 나를 파괴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적 이유가 있다. 그곳으로 가면 모두가 쓸모 있음으로 존재한다. 고향은 살아감이 자연과 동화되는 기이함을 발견한다. 그냥 살아지는 게 고향이다. 더불어 존재가 밝혀지는 장소다. 고향에서 꿈꾸는 세상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할 수 있는 자연이다. 자연과 가장 근접한 장소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둥지이다. 이윽고 고향이라는 언표는 자연과 동화된다. 귀향(歸鄕)은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장소라 할 수 있다. 그곳이 고향이라고 언표 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상상의 파괴를 실천하는 인간? 우연의 지구 안에 필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흐름인지. 아무래도 인간의 살아감은 필연 속에 갇혀 있는 듯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해석과 발견과 파괴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과 그 너머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 자체가 바로, 인간이 만든 그 다른 세계와 같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경험을 하지 못했다. 또한 증명되지 않는 현실 아닌가? 그러나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갈증이 낳은 허무함이다.
이 공허함과 마음 아픈 상황을 끝내야 한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어지러움은 미래에 대한 불만족이다. 허무가 낳은 끊임없는 불만족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 무자비한 폭력에 반격을 가하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지금이다. 내면의 나약함과 대결을 해야 할 시간이다. 매 순간 엄습하는 악마의 손길이 가까이 와 있다. 타락을 부추기고 비웃음을 선사한다. 역시 악마의 숨소리는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지금이야, 아주 타락하기에 딱 좋은 날이야.” 타락의 부추김과 비웃음의 농락은 매 순간 나를 움직인다. 뭐라고? 나를 움직인다고! 슬픈 일이다. 내가 어찌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단 말인가. 나의 세계는 그들에게 지배되었는가? 마음과 몸이 그들에게 조종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도 내 안에 있는 밝혀지지 않은 존재와 나 자신이 울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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