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말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제는 약화되고 있다. 반면 세속적-대중적 일반화-가치가 우월한 세상이다. 지난 역사의 그늘은 우리를 길들였다. 때문에 새로움의 창조는 너그럽지 않다. 우리는 당황하는 길을 나선다. 이윽고 세상의 나락(奈落)이 우리를 몰락하게 한다. 그 몰락의 의미가 쇠태(衰退)하는 요인이라고만 배웠다. 그래서 삶의 나락이 쾌락이라는 위안을 선사한다. 그리고 눈만 깜박거리며 살아간다. 역시나 우리는 지금을 숭배하는 어리석음에 조응(照應)한다. 여기 있는 사실이 왜곡(歪曲)되는 현실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을 숭배하는 밑거름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사실을 올바르게 보기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그로 인해 우리의 생각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아울러 성격의 장애를 얻어내는 불우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본능은 살아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발산하는 자기 힘의 펼침은 우리의 책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광기는 살아 있어야 한다. 당신이 발산하는 광기에 대해 이해하지 않는 부류가 많다면, 당신은 자신을 데려오는 중이니 기뻐할 일이다.
홀로 자라는 나무는 성자(聖者)임에 틀림없다. 자연으로부터 경이로움을 느끼는 기특함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중력의 억눌림에도 솟아오르려는 의지를 갖는다. 반면 자연을 거스르는 시간, 공간, 이데올로기의 장난질은 사람을 오락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모든 존재자를 가치로 둔갑시켰다. 이 거대한 수용소에서 인간은 천국에 산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를 없앤다고 이성이 기뻐할까? 그러한 난해한 숙제를 제거한다고 세상은 아름다운가? 여기서 사리분별이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맑고 높게 보이는 이유는 그냥 그렇기 때문이다. 나의 시야가 맑아서 그런 게 아니다. 나의 이성이 전부 올바르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행복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정념(情念)이 이야기하는 허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름 같은 흩어짐일 뿐더러 고약한 냄새일 뿐이다. 오늘 주위를 살펴보건대 맑구나. 세상은 맑은 기운이 사람을 살게 한다. 자연과 사람은 원래 자연이었다. 잔잔한 바다의 깊이를 체험했는가? 이처럼 잔잔함이 선사하는 성찰은 기쁨이다. 게다가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욕망을 선물한다.
깊은 심연 속 타락한 사상에는 창조하는 생성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욕망 안에 내재한 사실은 근거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 없이 어찌 타락이라는 구렁텅이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타락해 있다. 그러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마라. 변화에는 아무것도 머무를 수 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사라지고 생성하는 변화에 대해 창을 뽑아야 한다. 환상을 꿈꾸는 자만이 영원할 수 있다. 저기 보이는 몽상가(夢想家)의 자태는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힘이 넘치고 거대하다. 우리의 가느다란 깃털의 발버둥은 어울리지 않는다. 웅장하게 치솟는 깃털의 다름을 연구해라.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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