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34)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종교를 만들었다. 아울러 신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신’이라는 가상을 생각해 낸 탁월한 능력을 찬양해야 한다. 종교적 영생이 선사한 ‘위안’은 참으로 거대한 함선과도 같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그 크기가 생존율에 비례한다. 이 같은 종교적 이상이 거대한 배를 만들게 되었다. 인간이 영생과 평안을 갈구하는 동물로 성장한 것은 좋은 일이다. 설령 그러한 목적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종교는 세상에 던져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편으로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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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평생을 ‘신의 영역’에 안착하기 위해 구도자의 길을 걷는 수도자들의 진념은 이것이다. 수도자 스스로 ‘신’을 호명하고 호출하는 경지에 오르는 시간을 갖는다. 인간 영혼은 그렇게 해서 갈망하는 도구를 쟁취한다. 그러나 종교가 갖는 교리의 모든 내용이 신이 선사한 선물은 아니다. 우리 인류의 쓰라린 세월이 낳은 현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각각 주체적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최종적 결말이 무엇이든지, 이 세계는 그 주체적 산물에 의한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을 숭배하거나 영접하는 체험은 구도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채는 세계다. 그와 다른 무리들은 알 수 없는 그들의 것이기에 그 또한 소중하다.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 보고 생각하는 자신을 느꼈다. 자기 주체적 감각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인간을 규정하는 말이 있다. “인간은 자유인이 아니면 노예다.”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연스런 말인가. 현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가 말하는 수학적 진리가 있다.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에 따른 인간의 영역은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나 내가 느끼는 창조적 발상의 꿈틀거림이 있을 것이다. 이는 나를 이해시켜야 하는 논리적 과제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삶에 대한 답은 수학적 정답보다 논리적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이 옳다. 그다음 자기 존재를 데려오는 사상적 의지가 필요하다.

이와 어울러 역사의 순간은 물의 흐름을 갈라놓거나 변하게 하는 요인이 많았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지나온 역사에게 무엇을 말하겠는가? 사라지고 변했지만 그러한 역사의 유산이 현재일 뿐이다. 우리 의식을 더 굵은 새끼줄로 동여매는 사랑스러움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세계에서 얻어 보려는 찾아나섬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가 인간이 지금을 사는 위대함이다. 오늘을 사는 나는 인식 가능 범위 내의 환경에 의해 존재한다. 반면 내가 보는 외부 세계가 있다. 외부 세계가 가리키는 환경은 주관적 발견에 의해서 달라진다. 이 두 가지가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이다. 그리고 삶은 어떠한 조건에도 독자적으로 발전된다. 더 이상 삶의 방식과 의미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행위는 그만하자. 어떠한 단조로운 깨달음이 더욱 강하게 내 자신을 무장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보자. 규정하고 정의하는 삶의 조건은 나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자기 외의 모든 외부 조건을 해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삶의 방식은 나의 조건이 제시하는 대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즉 나의 주관적 표현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단순함에서 비롯된 나의 사상은 무의식의 따라감을 의심하리라.

사람은 죽음의 명제를 관념 속에 간직하면서 산다. 그렇기에 인간의 죽음은 다른 외부적 동물들의 죽음과는 다르다. 인간은 마음으로 산다는 실존적 성향이 있다. 마음엔 늙음이 없다. 마음으로 비롯된 우리의 살아감은 항상 역동적이다. 다만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동물은 끝나기 때문에 인간과는 동떨어져 있다. 인간이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한다는 가설을 내세워 볼 일이다. 우리의 현재는 죽음을 향한 변명을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러한 삶의 끔찍함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는 의무감, 저녁에 자야 되는 의무감, 일하고 슬픔과 쾌락을 느끼는 동물이다. 그리고 고통을 즐겨야 하는 책임감으로 산다. 이러한 동물이 ‘인간’ 아니겠는가? 이는 인간만이 느끼는 마음이 행하는 실체적 삶으로 귀결된다. 시간을 인식하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허무하게도 아무런 생명 없음―신을 만들려는―에 충성을 다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타나지 않고 굳어져 있으며 자기 존재를 밝히지 않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를 숭배한다. 이렇게 수양하는 삶의 자세는 고통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견디는 연습을 하고 삶의 의무감을 충실히 발휘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에 상상력으로 실체가 없는 허무를 갈구하는 동물이다. 더구나 허무 자체를 가시화하여 개념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과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더 나아가 가상적 가공품―행복―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유를 누가 정의 내리고 선물한단 말인가? 썩어가는 정신을 구재(救災)하는 것은 구도자의 목적이 아니다. 다행히도 인식 능력과 자연스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한 영적인 내면세상이 과연 내가 느끼는 사실인지를 물어야 한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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