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35)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사람이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언어의 위험성을 안 건가? 그렇다면 이미 성인(聖仁)이라 할 수 있다. 실수가 되었든 현명함이 되었든 상관없다. 언어의 위험성을 간파한 사람은 말을 두려워한다. 인간이 가장 타락한 증거는 언어에 있다. 언어의 이중성이 갖는 모순은 너무나 많다. 돌이켜보면 인간 언어의 난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언어가 선사하는 피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반면 논리나 과학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곳은 평화로운 침묵의 고향이다. 삶의 방식을 논하고자 한다면 오늘부터 침묵하라. 대신, 깨달은 정신을 말로 표현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될 것이다. 실로 가장 올바른 실체적 살아감이 무엇인지 침묵으로 말해야 한다. 이는 곧 마음이다. 마음으로 침묵하는 자는 삶을 사랑하는 가능성이 많다. 그는 스스로 내면으로 정신을 집중한다. 삶에 어색할 수 있으나 시도하는 자이다. 또 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침묵의 일반은 마음이 작동하는 ‘나로 돌아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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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오는 실천은 존재 가능성을 침묵으로 표현한다. 한편, 세상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은 무엇인가? 어쩌면 에너지의 방출이며 몰락이다. 그리고 힘을 발휘하기 위한 준비 운동이다. 이러한 의지는 나를 가두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숙제를 내포한다. 그러한 과정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영혼의 방출을 자제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내적 포만감이 충만할 때 방출되는 배설이다. 이렇게 내 안의 존재를 밝히는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최고로 발달된 사고력의 실천은 자신을 스스로 데려오는 능력이다. 내면적 사상과 대면하는 사람은 침묵을 아는 자이다.

나의 존재가 머지않아 사라진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위기감이 주입되면 몸부림치는 기술이 탁월하다. 예를 들면 나의 일상적 평화에서 갖지 못한 소중함을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릴 때이다. 인간관계 및 건강 등의 상실이 엄습할 때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본래적―현재 나를 잃어버린―살아감에서 본래적―미래의 나를 데려오는―살아감을 깨달은 순간이 온다. 비로소 사라짐에 대한 무(無)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 순간은 자기 존재를 인식하게 되며 진정한 자유의지를 펼치는 시작이다.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살았다. 자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자이다. 이 순간을 숨 쉬고 있는 그들은 우리에게 잔상으로 남아 있다. 잔상으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일구는 요인이다. 그에 더해 지나간 역사 속 기억들도 힘차게 지금을 나아가게 한다. 사랑스럽게, 용기 있게 대면하는 이들이 우리들의 영웅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기 위해 살아간다.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는 두 존재 내지는 세 개의 다른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내 안에서 투쟁의 연속성에 구속되며 살아간다. 또 승리의 깃발이 존재하지 않는데 마치 뭔가 있는 듯 전투적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리고 스스로 거짓 욕망과 타협하며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결국은 스스로 실망하면서 말이다. 시선을 높게 올려보면 거대한 천상이 보인다. 반대로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당연히 지상의 삶이 반긴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천상의 그림은 나의 자유롭고 독립적 상상의 서판(書板)이 될 수 있다.

그대 자유로워졌는가? 천상을 보았구나.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기뻐해도 될 일이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지상에서 소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곳에선 우리는 어차피 노예다. 스스로 가둘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허약해졌는가? 그랬다면 이미 타락했다는 증거다. 아직도 가둘 수 없는 마음이 있는가? 또한 붙잡지 못한 시간을 후회하는가? 그렇게 친절한 마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 놓아버린 심장에게 애원한다. 하지만 다시는 새로운 피는 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돌아올 수 없다. 가장 무섭고 두려워야 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적이 되면 될수록 자신을 전투적으로 가두는 영웅이 된다. 그 길이 자신이 되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은 위험하게 살 필요가 있다. 가장 빛나는 삶은 위험한 자기표현에서 나올 것이다. 인류는 침묵을 강요받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의 표현은 성찰이다. 역사가 말하듯 침묵은 비겁함에 대답하지 않는다. 보자, 가장 밝은 곳을 찾아 헤매는 것도 우리다. 탐구하고 생성하는 곳이 나의 표현의 장소다. 삶의 희극과 비극이 주는 선물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에 드러내는 행동은 지극한 살아감이다. 당신의 표현은 두 가지일 것이다. 침묵과 말함이다.

살다 보면 나의 주체적 표현에 따른 긴장감이 있을 것이다. 이에 자극받지 않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고통의 아름다운 자극에서 살아 움직임을 감지한다. 그래서 인간의 필멸(必滅)이 알려주는 교훈이 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자극적인 죽음은 사라짐에 대한 저항으로 살아간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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