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의 탁월함은 삶의 강력한 힘에서 비롯됐다. 몰락을 감행하였고 창조적 파괴자로 거듭났다. 그리고 기존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생성의 가치를 말했다. 위버멘쉬는 스승에 대한 제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을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이렇게 스승은 제자에게 사상의 예리한 칼을 휘두르기를 요구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든 아울러 이해하지 못하든, 나는 위버멘쉬를 넘어서야 한다. 이제 준비가 되었는가? 나의 말을 들을 준비 말이다. 나는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단지 존재를 일으키는 네오위버멘쉬에 대한 입구를 말할 뿐이다. 위버멘쉬는 자기 힘에서 나오는 자기표현으로 살아간다. 더불어 영원히 돌고 도는 세상에 순간을 즐기는 자이다. 이제는 그 이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을 품은 자를 데려와야 한다. 이윽고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네오위버멘쉬는 어떠한 사상을 품어야 하는가? 위버멘쉬를 뛰어넘는 자기 극복 위에 서 있는 그는 누구여야 할까? 그보다 더 강한 내적 공덕이 쌓여야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새로운 사상과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을 강제하지 않는다. 위버멘쉬를 능가하는 인간은 옳고 그름을 초월한 ‘자기 자신을 언제 어디서나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일 것이다. 위버멘쉬를 장착한 겸손하고 소박하며 단순함을 아는 네오위버멘쉬를 데려오리라. 더 나아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유정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음의 표현을 충실히 실천할 사람이다. 또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알고 그곳으로 향하는 우리들이다. 게다가 자기표현의 강함을 언제 어디서나 연출하는 광대 삶을 예술처럼 사는 이기도 하다.
삶이 보여주는 파노라마는 무엇을 그려야 할까? 살아감의 순수하고 단순한 자기표현이다. 인공적 삶의 풍경으로부터 멀어진 자기만의 서사를 그려내는 자세이다. 예를 들면, 시인이나 철학자 광인을 포함한 인위적 가공으로부터 동떨어져있는 자이다. 또 내면의 풍부한 갈망에 의해 단조롭거나 다채로운 그림으로 표현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인간 삶의 진보적 가치는 자기를 소화하는 능력으로 발휘된다. 더불어 자기를 소화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인식하고 견딘다. 그리고 기꺼이 자기를 용납하는 인간 유형이다. 아울러 대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감탄을 연발하는 인간 유형도 포함된다. 이 같은 내적 충만함은 살아가는 단순함으로부터 시작이다. 또 이 세상을 깊은 감수성으로 표현하는 웅장함을 말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존재방식이다.
인류의 변화되는 역동성은 가느다란 실과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 이어서 단단한 밧줄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 그렇게 실현되는 현상이다. 또한 그 지점을 넘어가는 행위는 마찬가지로 나를 보았기에 가능한 일로 나타난다. 하나 과정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라지는 가능성을 다시금 나타나게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의지로 표현된다. 그것은 내가 인식하는 첫 번째 사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작이다. 그건 바로 나와의 대면이며 ‘지극한 자기 사랑’이다.
우리는 약속을 하루에도 무수한 반복으로 저지르고 산다. 약속된 결행은 자기와의 토론의 결과이다. 또한 당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투임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스스로‘나 자신이’된다는 위대함을 적극 응원해야 한다. 그러한 실천은 지금의 내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속박되지 않고 구름 위를 걷는 신선과도 같은 성찰은 바라봄의 결정체다. 어느 한 곳에 가려지지 않는 신선함은 주위를 맑게 하는 자연스러움이다. 이에 기뻐하는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충만한 사실이 놓여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여기 있음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편 나를 가두는 마음과 내가 돼가는 마음을 구분할 수 있는 욕심이 있다. 그 욕심을 펼치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 내가 사라지는 것과 나를 보게 되는 갈림길에 있을 경우이다. 이로써 자기의 사고력을 밀고 나가는 현명함이 존재한다. 이는 나를 더욱 빛나게 하는 단순함으로 기쁨을 맛볼 것이다. 아울러 구름 위에 떠도는 역동성을 포착하게 된다. 그때 우리의 본능은 대지의 충만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자연으로의 복귀는 권태와 허무함을 무력화시키는 원동력으로 다가온다. 비로소 나의 네오위버멘쉬는 이 대지위에서 춤추는 광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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