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40)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자기 극복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자는 더 고귀하고 욕망이 가득한 사상을 얻는다. 더 나아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단계로 변신을 꾀한다. 아울러 경이로운 기분을 아는 네오위버멘쉬는 천상과 대지를 사랑한다. 그는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차라리 숨어 있다. 그 대신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예우를 갖춘 사람이다. 그의 밖에 실존하는 자연스러움에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창작자이다. 더구나 자기만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축복을 선사한다. 이러한 설명은 네오위버멘쉬가 기대하는 미래의 희망이다. 또 경이로운 자연 속에 기꺼이 숨 쉬고자 하는 존재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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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선사하는 청량한 아침공기는 우리에게 새로움을 시작하게 하는 바람이었다. 물의 단조로운 물결은 거대한 마무리를 갈망한다. 저 너머 해지는 노을의 반복은 삶의 단조로움에 슬픈 기운마저 보태려 한다. 그래서 항상 기운찬 시작은 노을을 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악마로 변하게 하는 웃음을 먹게 하는 것 같다. 사라지지 않는 악마적 노을리라! 내가 네오위버멘쉬를 말하는 건 실험도 가정도 설득도 아니다. 인간이 느끼는 허무함에 대한 반항이며 맞서는 행위다. 단순하게 조명된 사상적 배아(胚芽)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구름처럼 만져지지 않을 깊이를 애써 수색하려는 철없는 짓이기도 하다.

이러한 반항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나타나는 자기 존재의 갈망이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자기 과시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결과물에 쉽게 납득하지 않는다는 저항일 거다. 그래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슬픔은 몰락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뭔가를 잡을 수 없다는 체념만큼 억울한 경우도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슬픔으로부터 이해하는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몰락이라는 침몰된 두려움은 새로운 저항의 씨앗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내일의 희망을 품는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회귀(回歸) 앞에 저항정신이 낳은 생성의 결과물이 나의 존재를 밝혀낸다.

나를 감싸는 자연의 맑은 보랏빛과 흐르는 물결은 존재의 의무를 재촉한다. 그래서 그에 적합한 가장 뛰어난 인간형을 수배해 보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을 꿈꾸는 일이 욕심일까. 혹시 나에게 악의적으로 응답하더라도 말이다. 설령 찾아지지 않는다면 순박한 영혼에 대한 악마의 속삭임이 잠재우기 때문인가? 이 속삭임? 우울함인가? 우울함의 원인은 간단하다. 다가옴에 대한 불순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움이 상존(常存)하는 경우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살아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다가옴에 대한 일어나지도 않는 사태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인간은 두려움의 소설을 창작한다. 이는 순수한 영혼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따져보면 지금 상상으로 염려하는 미래의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우연과 필연은 인간이 창안한 기만적 용어일 뿐이다. 이 모든 세상일은‘그냥 그대로 나타’ 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자연세계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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