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네오위버멘쉬를 맞이하기엔 대중의 기득권이 너무 강한 느낌이다. 시대적으로 거대한 문화와 문명이 우리를 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네오위버멘쉬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엔 어색하다. 새로운 태양과 새벽은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 무리 속 태양은 새롭지 않다. 설령 존재하더라도 너무나 부끄러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동지들의 숙성된 과정이 너무 길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으로 우리들은 현대의 거대담론에 의해 이미 숙성되었다. 그래서 변화되지 못할 숙명을 안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숙성이 우리들을 가두고 있다. 그래서 거짓 숙성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두렵지만 끝없는 인간 미래는 아무리 노를 저어도 도달할 수 없다. 즉 피안의 땅을 선사하지 않는다. 길고 긴 억눌림에 일어서 보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쾌락을 선물하고 달래려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머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오위버멘쉬는 우리들 중에 누구나에게 꿈틀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선물은 자기 내면의 갈등과 화해하고 승리하는 자가 받는다. 또한 자기를 온전히 분리시켜 삶을 놀이로 즐기려는 사람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높이 올라가게끔 욕망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한 번의 인생이 허무하다면 건강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는 인간이다. 그는 곧 자기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이다. 필연적인 인간 삶의 고통에서 무한 긍정으로 화답하는 숭고함이 있을까?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 가능하다는 건 인간이기에 그렇다. 그러한 사람은 운명적인 역풍과 거센 파도를 흔들림 없이 올라타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에게 닥친 바람과 파도가 꺾일 때 다시 태어나는 용감함을 증명하는 평화로움이다. 이 대지에서 사라지고 네오위버멘쉬를 예고한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거친 바람과 높은 파도와 함께한다. 이윽고 넓은 바다는 우리들의 무대로써 수많은 파노라마를 선사한다. 이어서 우리는 그와 함께 춤추는 광대가 된다. 따라서 나의 실존의 존재방식을 실감하는 행운이 따라오리라. 아울러 붉은 태양의 찬란함은 ‘자기로 돌아오게 하는’ 서광(曙光)이다.
인간의 고통은 내면과 외면의 고통으로 나뉜다.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신체적 아픔이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더불어 정신적 괴로움으로 신체가 망가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현상에 도전적이지 않으면 나의 정신과 육체는 변화에 굴복한다. 그래서 몸 안에 번지는 정신적·신체적 독소를 제거하는 도구를 개발해야 한다. 정신적·육체적 독소를 제거하는 데 유쾌한 광기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험해 보라. 유쾌한 광기는 자신 안에 축척된 독을 배설하는 능력이다. 물론 유쾌한 광기는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볼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쉽게 풀어갈 수 없는 난관(難關)에 대해, 나를 단단하게 하는 보석이 숨겨져 있다. 그 보석이란 발견되지 않으며 내가 찾아야 할 “나의 존재”이다. 그것이 인생에서 책임을 갖고 찾아 나섬을 실천하는 명령이다.
그래서 외부적 고통이 나를 파괴할지라도 우리 상상의 그림을 넓게 그려보자. 그러한 고통의 급습은 오히려 나를 굳건히 다지는 쓸모 있는 양식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건 나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될 기쁨이다. 보라! 꿈꾸게 하는 자가 얼마나 용감한 놈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자는 의미라는 것에 노출되기를 꺼려한다. 다만 군중 속에 안락함을 최고의 가치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결국 돌아오는 건, 나를 버렸다는 기만적 술책에 대한 후회만 남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않아야 할 책임은‘여기 있음에서 왜? 사는가?’란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사명감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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