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네오위버멘쉬를 위하여(47)

조석중 기자
조석중 경영학 박사
조석중 경영학 박사

나는 위버멘쉬와 네오위버멘쉬를 제외한 사람살이의 일반론을 고백한다. 우리는 흔히 ‘자기 극복의 과정’을 산다고 말한다. 이같이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 극복해야 할 숙제가 많다. 이는 살아가는 데 달려드는 숙제에 대한 도전이다. 말하자면 반항하는 사유(思惟)를 말한다. 즉 현실에 놓인 현상에 대해 개념을 파악하고 구조화하는 나아감이다. 아울러 추론에 의한 올바른 판단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인간이 매 순간 최선의 이성적 작용을 응답받기는 힘들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지극히 제한적 과제 속에서 발휘되는 표현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적 한계선에서 자기를 극복하는 우연의 사건에만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애써 나름의 고통의 과정을 해소시키는 방법도 될 일이다.

광명시청_메인중앙하단_260824
안성시청_바우덕이축제_메인 하단_260908

우리는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의 위상을 찬양한다. 그러나 현실적 세상의 보편화를 살펴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극복 자는 자기 한계를 인식하는 자이다. 그것은 줄기차게 자기와의 대면에서 고통과 후회를 반복한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도 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문을 받는다. 그것은 불완전성을 인식하는 자세이다. 따라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자신과 살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신이 되지 않으면 되고 불완전함을 인정하면 된다. 그러나 이미 지금의 인간은 신을 넘어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파괴와 새로움을 갈구한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신’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새롭게 창조하는 정신은 완벽한 구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자기 연민과 채찍’이 나를 살게 하는 내일이 될 수 있다는 슬픈 가정이다. 이렇게 세속적 인간을 고백했다.

자유로운 정신의 확보는, 나를 어떠한 경우에도 구속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울러 허무감을 느끼지 않는 내적 강인함이다. 인생 역경의 순환은 당연한 삶의 일부이다. 이를 전부 극복하는 의무적 사고의 연속은 스스로를 쓰러지게 한다. 내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무거운 힘으로 짓누르는 것에 대한 올바른 저항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자기 생존방식과 힘을 동반한다. 이를 자연적 조건에서 나오는 생존방식의 기초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삶에 대한 방식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는 자신의 역량과 결부된다. 그리고 최대한 살아감에 대한 저항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인간실존은 ‘자신의 능력 상승에서 비롯된 삶의 질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이 소유한 능력과 함께 그 능력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의 발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도 같다. 실제로 외부적 환경의 힘을 얻어, 내가 다룰 수 있는 삶의 방식은 한계가 있다. 그것보다는, 자기 힘을 발산한다는 각오와 함께 정당성을 빛내리라. 자신에게 자유롭다는 의미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가운데 이루는 삶이다. 반면 외부적 조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은 스스로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한 기대감에 의지한 인생은 나에게 도래하는 자유를 내 던지는 꼴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조건은 ‘나의 역량에서’ 비롯돼야 한다.

네오위버멘쉬의 바람이 역경의 설산(雪山)을 오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극복하는 지점에서 살짝 느끼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세상을 부드럽게 만질 수 있는 자기만의 고집이 요구된다. 또한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에게 무엇 하나도 소유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는 두려움이 최악이다. 이러한 감성적 위기감은 줄곧 인간을 나약하게 하였던 삶이었다. 반면 극복하는 자는 자기의 한계점을 인식하는 자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네오위버멘쉬는 한계점을 넘어, 그 이상의 한계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와 같은 실천자는 ‘자기를 알았다’는 증거이다. 자기를 인식하는 자는 철저히 실존적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다음 주에 계속>

수원특례시의회_08 (265x118)
260623_인천도시공사

저작권자 © 중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관련 기사

0개의 댓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