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문=오기춘 기자] 임진강 북쪽 절벽 위, 푸르른 구릉을 따라 완만히 펼쳐진 성곽. 찜통더위가 이어지는 8일 오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한 호로고루성을 찾았다.
호로고루성은 2006년 사적 제467호로 지정된 고구려 후기의 평지성이다. 전체 둘레는 약 401m로, 동쪽은 경사면, 북쪽과 남쪽은 임진강 절벽에 맞닿아 삼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자연의 방어선을 등에 업고 인공 축성이 더해진,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다.
드론을 이용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이 성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략과 미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성벽은 흙과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토석혼축(흙과 돌 혼합축조)' 방식으로 단단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을 품고 있다. 이 축성 기법은 고구려 특유의 기술로, 방어와 미학을 동시에 구현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호로고루’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곳은 6세기 중엽부터 약 200년간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치하던 접경 지역의 핵심 방어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철원에서 연천에 이르는 국방선을 구축했고, 호로고루는 그 전방 요충지로 기능했다. 군사적 중요성은 물론, 행정적 기능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991년부터 진행된 학술 발굴조사에서는 목책, 우물, 온돌 주거지, 배수시설 등이 확인됐고, 연화문 와당과 치미, 착고기와 등 고위 관방 건축에 쓰이던 기와도 다수 출토됐다. 이는 호로고루성이 단순한 성이 아니라, 상시 병력이 주둔하며 관방 기능까지 수행하던 고구려의 고급 국방기지였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고구려 유적 중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고구려 성이 산악에 지어진 것과 달리, 평지성과 절벽이 결합된 이 구조는 국내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다. 이는 호로고루성이 지형적 특수성과 전략적 필요를 모두 고려해 축조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늘날 호로고루성은 천 년의 침묵을 딛고 다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성벽은 복원돼 탐방로와 연결됐고, 잔디밭과 발굴 구역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열린 박물관’으로 기능한다. 특히 여름철에는 성 아래 해바라기 꽃밭이 노랗게 물들어 인생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모두 무료이며, 인근에는 광개토대왕릉비 실물 크기 복제 전시관도 운영돼 역사 체험 교육 장소로도 활용된다.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사람과 자연,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의 공간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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