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56) 부평동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

남용우 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부평1동의 동아·대림 아파트와 산곡동 미군부대, 화랑농장 일대를 조병창(造兵廠)이라 부른다. 조병창은 ‘병기(무기)를 만드는 창고’라는 뜻으로 일제 때 이곳에 군수품을 만들던 ‘인천육군조병창’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조병창은 원래 일본 오사카에서 총이나 화약을 만들던 곳이다. 부평의 조병창은 일제가 조선을 중국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그 일환으로 오사카 조병창의 지역공장 격으로 일본이 다른 나라에 세운 유일한 조병창으로 기록돼 있다.

1939년에 착공한 인천육군조병창에서는 각 가정에서 쓰던 놋그릇까지 거둬들일 정도로 철저한 공출을 통해 쇠붙이를 모으고, 그를 이용해 매달 소총 4000정과 총점 2만정,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대 등을 생산해 냈다. 2차 세계대전 말 영미귀축(英美鬼畜)과 1억 인 총 옥쇄(1億人 總 玉碎)를 외치며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마지막 저항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제가 시행한 ‘국민 총 동원령’에 따라 학생들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동원돼 강제 노역을 했다. 끌려온 사람들은 공장 안에 있는 숙소에서 일본 군대식의 생활을 하며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이 된 뒤 조병창 자리에는 미군부대 ‘캠프 마켓’등이 들어섰으며 나머지 땅은 국유화 됐다가 일반에 팔려 오늘날에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 등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의 롯데백화점도 당시의 조병창 자리였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준비하기위해 만든 조병창 자리.현재 미군부대가 들어서있다. (사진제공=부평구)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준비하기위해 만든 조병창 자리.현재 미군부대가 들어서있다. (사진제공=부평구)

한편 이 백화점 앞 복개천 주변에는 일본 명으로 ‘다다 구미’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1940년 일제가 부평의 조병창을 확장 공사할 때 하청업자 중 하나였던 다다 구미의 현장 사무소가 있던 자리다. 광복 뒤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다다 구미가 철수해 빈 땅이 되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하나둘씩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곳에 미군들이 상주하며 인근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클럽)이 늘어나고 다다 구미가 있던 곳(동아백화점 후문)에 홍등가(집창촌)가 들어섰다. 한때 이 동네의 이름을 ‘평화촌’으로 부르자는 시도가 있었지만 끝내 고쳐지지 않고 다다 구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세인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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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클럽에는 미군을 접대하기 위한 여성들이 고용되고 나아가는 그들과 교제 및 동거하는 여성들이 크게 늘어났다. 일명 양공주(미군과 함께 사는 여자)라는 말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들 양공주들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순정파로 분류되는 미군을 만난 여성은 미군이 귀국할 때 국제결혼을 하고 따라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성공하며 동료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반해 고약한 미군들은 아이를 낳거나 임신을 시킨 뒤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자 몰래 본국으로 귀국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은 피부와 생김새가 달라 ‘아이노고(튀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가며 한평생을 눈물로 살아야 했다. 심지어는 주위의 시선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이 낳은 자식을 머나먼 이국땅에 입양시키거나 고아원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국제결혼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자체를 경시하던 시대로 이들 양공주들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심했다.

한편에서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이들을 애국자라고도 했으나, 실제로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이다.

1970년대 초 까지도 이곳 부평동에는 클럽을 고쳐 식당으로 운영하는 곳이 더러 있었다. 이곳 식당들에 설치된 용변기가 다른 식당에 비해 유독 높게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클럽을 운영할 때 이곳을 이용하던 미군들의 키에 마쳐 용변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비해 키가 작은 우리들이 용변을 보기 위해서는 발 뒤꿈치를 들고 일을 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1960년대 이곳에는 대마초가 유행했다. 필자도 1960년대 후반, 고등학생 시절 같은 반 친구를 따라 이곳에 놀러 가 친구들과 함께 호기심에 대마초를 피워봤던 경험이 있다. 머리가 어지럽고 침이 마르며 구토증세가 나는 등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한번 경험한 후로는 손에 대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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