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좌동(佳佐洞)은 ‘가재울’ 또는 ‘가재올’이라 불리던 우리말 동네 이름이 한자로 바뀐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이곳의 작은 마을에 물이 다 말라버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고려시대 이 연못에서 아주 큰 가재가 한 마리 나와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가재울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가재울은 사실상 갯골에서 생긴 말이다.
옛말 ‘곳’에서 비롯된 ‘갓’은 지금도 갓길 같은 단어에 쓰이는 것처럼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에 사이시옷이 붙은 꼴이다. ‘올’은 마을을 뜻하는 우리말 ‘골’에서 ‘ㄱ’이 떨어져 나간 형태다. 따라서 갓골은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곳이 바닷가(육지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물가, 또는 어느 지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이 한둘이 아닐 터이니 당연히 우리나라에는 이와 같은 땅 이름이 많다. 그 형태는 갓골뿐 아니라 가자골, 가자울, 가작골, 가작굴, 가재골, 가재울, 가잿골, 가좌동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이 중에는 ‘가장자리 마을’이 아니라 ‘가까운 마을’이라는 뜻을 갖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거리가 조금 가깝다는 뜻의 우리말 ‘가직하다’에서 비롯된 것이며, 먼저 생긴 근처의 어떤 마을에서 가까운데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직 골’이라 불렸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가재골 등으로 모양을 바꾸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가재와 관계가 있어 가재골이란 이름을 갖게 된 곳도 있겠지만 가재와 관계없이 생긴 곳이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런 계통의 이름 해석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우리말 음운 변화에 따른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그 지역의 특성을 살펴 결정해야 할 일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가좌동 지역을 ‘개건너’라고도 불렀다.
‘개건너’라고 불리던 가좌동은 부평군 모월곶면 가좌리로 1914년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해 부천군 석곶면이 되었다. 그 후 1940년 인천부에 편입돼 천강정이 되었으며, 1946년 가좌동으로 바뀌었다. ‘가마굴’, ‘능안’, ‘건지골’, ‘살구지’, ‘네 집 네’ 같은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이들 지역은 나중에 1, 2, 3, 4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졌다.
‘개건너’는 인천대학교 체육관에서 주안 4, 5, 6 산업공단 사이의 큰 갯골을 말하는데 지금도 인천시립병원에서 공단방향으로 이어지는 하천 줄기가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인천대 체육관 뒤쪽으로는 마을이 없이 외딴집들이 몇 가옥씩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울 건너 ‘개건너’에는 그나마도 집을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옥 수가 적었다. 특히 인천교를 지나면 주택은 보이지 않고 염전이 끝없이 이어져 삭막함만 안겨주었다.
주안과 도화동에 살던 사람들이 여름철에 수영을 하기 위해 가끔 인천교를 찾았을 뿐, 평소에는 인적조차 뜸하던 이곳이 1968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가좌동 톨게이트를 중심으로 인구가 모여들며 신도시가 형성되며 인근의 가정동, 석남동 등으로 급속히 확산돼 나갔다. 말 그대로 갯골 건너 ‘개건너’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곳 가좌동은 구한말까지 부평구 석곶면 가재리였다가 그 발음이 바뀌어 1914년 가좌리가 됐고, 광복 뒤에 그대로 가좌동이 됐다. 그 유래를 알고 보면 가재리든, 가좌동 이든 모두 한자는 그 자체의 뜻과 관계없이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소리만 빌려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좌동은 ‘건지 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이는 옛날 이 마을에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전해지며, 이것이 이 우물에서 큰 가재가 나왔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지만 얼마나 믿을 수 있는 내용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가좌동은 1967년 3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의 기공식이 열린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은 많이 확장이 됐지만 이때 공사를 시작한 초기의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21일에 가좌동 톨게이트~서울 영등포 구간만이 개통됐다. 이어 1969년 7월 20일 가좌동~인천항 앞까지 나머지 구간도 뚫려 전체 길이 29.5km 왕복 4차선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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