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발전소가 있는 원창동 율도(栗島)의 원래 이름은 밤섬, 또는 밤염이었다. 그 생김새가 밤톨 모양이라 해서 밤섬이라 했고, 이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 율도다. 밤염은 이 밤섬에도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있었기에 불린 이름으로 보인다.
이 섬뿐 아니라, 원창동 일대에는 예로부터 염전이 많았고 조선시대에 서곳 일대에는 32 곶의 염벗이 있었다는 자료가 있다. 염벗에서 ‘벗’이란 염전에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어낼 때 사용하는 가마를 말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마로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들었지만, 1907년 주안염전에서 햇볕에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얻는 천일염제가 시작된 뒤로는 이 방식이 널리 사용하게 됐다.
그러나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금 사용량에 비해 생산량이 많이 부족해지자 호렴이라 불리는 중국산 소금을 수입했다. 당시 부천에 살던 최병희씨는 호렴 수입과 판매에 탁월한 수완을 보여 ‘소금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염전은 그 뒤 매립사업에 밀려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율도에는 임진왜란 때 700명의 의사와 함께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죽은 중봉 조헌 선생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중봉은 통진현감으로 있던 1577년 34세에 죄인을 심문하다 죽게 한일로 부평에 유배를 당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돼 한양으로 올라오던 길에 우연히 만난 김 씨 성을 가진 총각이 오갈 곳이 없는 것을 알고 집에 데려와 함께 살며 이웃 처녀와 결혼도 시켜주었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중봉은 부평 유배시절 잘 알게 된 이곳의 지리나 인심을 생각해서 김씨 부부를 밤섬으로 보내 바다를 막아 논과 밭을 만들게 했다. 또 집을 짓되 찹쌀을 떡처럼 찧어 벽에 바르도록 했다. 양식이 떨어져도 벽에 붙은 찹쌀을 떼어 끼니를 연명토록 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은 자신과 김 씨 부부의 가족을 이곳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싸움터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렇게 왜란이 끝난 뒤 이곳에 살던 중봉의 후손들은 충남 옥천 등 다른 곳으로 모두 떠나고 김 씨 부부의 후손들만 남아 살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김 씨 부부의 자손들도 1974년 이곳에 인천화력발전소가 세워질 때 그나마 모두 떠났다고 한다.
율도는 송도(동막)에서부터 월미도를 거쳐 해안가를 타고 내려오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1970년대 당시 월미도에는 전투경찰(의무전경)이 해안 경비를 맡았으나 송도와 율도는 육군이 담당했다. 당시 율도에 근무 중인 친구의 면회를 가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겨우 점심때가 되어야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불편했다.
전투경찰에 복역했던 필자도 휴가를 나와 친구 면회를 갔다. 버스를 타고 산을 굽이굽이 돌아 경인에너지 입구에서 하차해 1시간 이상 걸어야 중대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대본부에서 면회 신청을 한 뒤에도 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친구가 연락을 받고 본부에 도착하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듯 고생 끝에 만난 친구의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저절로 글썽하는 것을 참고 포옹으로 맞이했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한 것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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