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문=이건구 기자] “이 더위에 이런 일까지 해주다니” 수해로 무너진 포도밭 앞에서 어르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온은 섭씨 38도까지 치솟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날씨였다. 그러나 그날, 경기도재향군인회 봉사단은 삽이 아닌 손길을 들고 마을로 들어섰다. 그들의 걸음에는 명예가 있었고, 손에는 연대가 있었다.
뜨겁다 못해 따가울 정도의 태양빛이 내리쬐던 25일 오전 10시께, 경기도 내 30개 시·군 재향군인회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80여 명의 향군봉사단이 가평군 상면 율길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모두가 각자의 차량을 타고 현장에 집결했고, 첫 마디부터 더위였다.
“오늘 가평 기온 38도랍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꼭 물 잘 챙기세요” 도 사무처장의 간단한 전달사항이 끝나자, 봉사단원들은 삽과 장갑, 마대 자루를 챙기며 묵묵히 이동 준비를 마쳤다. 햇빛차단제와 얼음물, 수건도 각자 손에 들었다. 아직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이들의 셔츠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현장 배정은 세 개 팀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기자가 동행한 팀은 율길리 장막골 포도농가였다. 산사태로 쏟아져내린 흙탕물이 포도밭을 덮었고, 일부 제방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진흙은 무릎까지 차올랐고, 그 위를 걷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봉사단원들은 말없이 흙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조용히, 더위속에서도 삽질 작업은 계속됐다.
장막골에서 만난 어르신은 “30년 넘게 포도농사를 지었는데 이번처럼 큰 비는 처음”이라며 “토사처리도, 제방 복구도 엄두가 나지 않아 혼자 애만 태우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아들이 진해 해군기지에서 근무 중인데, 이렇게 향군이 찾아와 주니 더 감동이다.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땀에 젖은 장갑을 벗고 악수하는 그의 손은 거칠었고, 작은 떨림도 전해졌다.
기자가 생각하기엔 작은 떨림은 ‘감동표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밭 한편에서는 햇빛차단제를 서로의 팔에 발라주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봉사단원들은 토사로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고, 농가 주위를 정리하며 쉼 없이 움직였다. 솔안길 농가에서는 저온저장고 안까지 토사가 밀려든 상황이었다. 몇몇 단원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걸레로 흙을 닦아냈다. 경로당 마당에서는 토사와 진흙을 치우는 물청소가 이어졌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장화 위로, 물을 계속 뿌리고 또 뿌리며 복구 작업은 계속됐다.
봉사단원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도 있었고, 아직 정년이 되지 않은 젊은 회원도 있었다. 한 백발의 단원은 “우리는 옛날에 장마에 터진 논두렁만 봐도 어디부터 파야 할지 척척 알았어”라며 웃었고, 주변에선 잠시 웃음이 번졌다. 비록 군복은 입지 않았지만, 그들 각자는 무너진 삶의 자리 앞에서 여전히 명예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작업은 오후 3시30분까지 이어졌다. 기온은 여전히 38도를 웃돌았고, 일부 단원은 수건을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고, 중도에 돌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켰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경기도회 여영규 사무처장은 “이번 봉사는 법정 민간단체로서 향군의 설립 목적을 실현한 대표적 사례”라며 “폭염 속에서도 묵묵히 땀 흘리며 복구작업에 나선 단원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활동을 계기로 지역사회에서 향군의 이미지와 위상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이날 현장에는 이희숙 조직부장, 김현주 행정부장, 임종근 가평군회 사무국장, 오준필 구리시회 사무국장을 포함한 도내 시·군회 사무국장들이 대거 참여했다. 모두가 이름보다 손을 앞세웠고, 구슬땀이 이어진 자리에는 말보다 표정이, 명령보다 연대가 있었다.
한 봉사단원은 작업을 마친 후 기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국가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그게 오늘 내가 얻은 가장 큰 기쁨입니다”라고.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지난 1952년 2월1일 설립된 민간 안보단체로,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구호 아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향군은 ‘친목·애국·명예’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회원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국가 발전과 공익 증진을 목적으로 활동해왔으며, 특히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복구활동에 참여해왔다.
25일 가평 상면에서 이뤄진 복구작업은 단순한 삽질이 아니었다. 사람의 손과 마음으로 마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는 말없이 흘린 땀방울 속에서 국가와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떠올렸다. 경기도재향군인회의 봉사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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