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➆ 월미도

남용우 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섬 아닌 섬 월미도(月尾島). 월미도는 섬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월미도를 섬이라고 부른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몰라도 인천사람들은 월미도를 섬이라고 하지 않는다. 1970년대에 월미도 일대에 매립이 이뤄져 이제는 육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섬 월미도는 흔히 생김새가 반달(月)의 꼬리(尾행)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행정구역상 인천시 중구 북성동 1가에 속해 있다. 인천역을 지나 인천항 갑문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월미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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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세기의 작전이라고 부르던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의 인천 앞바다 상륙작전의 제1목표지점‘그린비치’가 바로 월미도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며 세계사에 남을 전공을 세운 것이다.

월미도는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런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월미도는 근대에 이르러 외세 침략의 주요 길목이 됐다.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당시 프랑스와 미국함대가 월미도 앞바다에 닻을 내렸고 일본 군함 운양호(1875년)역시 이곳에 정박했다. 그 후1891년 우리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의해 월미도지소차입약서를 체결하면서 월미도가 외세 침략의 본거지가 됐다.

1900년 송정섭이 정부로부터 월미도 개척 허가를 받아 이를 일본인 요시카와에게 전매하자 일본은 이를 기회로 개발에 나섰다. 1904년 월미도에 있는 민가를 강제로 철거한 뒤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설정한 뒤 녹화사업을 벌였다. 월미산을 중심으로 순환도로변에 벚나무를 심고 채벌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봄이면 벚꽃놀이로,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기 위한 발길이 끝이지 않자 1922년 일본은 지금의 대한제분공장 앞에서 월미도에 이르는 1km 길이의 둑길을 축조 관광객을 맞았다.

1922년  월미도 둑길. (사진제공=중구청)
1922년 월미도 둑길. (사진제공=중구청)

요정과 호텔 등 각종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유일한 임해유원지로 이름을 떨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특히 당시 경인간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바닷물을 데우는 조탕시설과 인공해수풀장을 만든데 이어 만조 때 바닷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요정 용궁각과 하마호텔이 들어서면서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자 조경호씨 등 10여 명의 지역 유지들이 ‘월미도관광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한국전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 여름철 동네 형들을 따라 중구 신흥동 집에서 하인천 부두를 지나 월미도 해수욕장으로 수영을 다녔다. 그때는 월미도에서 수영으로 등대까지 건너갔다 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등대 앞 조류가 급물살로 변해 물에 빠지는 익사사고가 매년 2~3건씩 발생했다. 친구가 물에 빠진 것을 모르고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리다가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집에 돌아와 사고 소식을 전하면 동네 어른들이 횃불을 만들어 월미도 해안가로 몰려가 밀물에 밀려온 시체를 찾아 돌아왔다. 나와 친구들은 각자 부모님들에게 밤새도록 야단을 맞고 벌로 저녁을 굶은 채 울다 지쳐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쪼그린 자세로 잠이 들곤 했다.

1960년대 초 12월24일 크리스마스 때면 월미도 내 미군부대에서 인천시민들을 초청해 선물을 주고 농구 경기를 보여주던 기억이 난다. 당시 시커먼 미군(농구선수)들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얼굴을 보려면 한참을 치켜 올려 봐야했으며 농구화를 신은 발은 얼마나 큰지 놀라 자빠질 것 같았다.

1970년대 초에 들어서 월미도는 젊은 선남선녀에게 최고의 인기 데이트 코스였다. 그 당시 ‘연뽀연걸’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연은 사모한다, 연애한다는 뜻이고 ‘뽀’는 보이, ‘걸’은 소녀를 뜻하는 영어로 연애를 하는 남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월미도 열차. (사진=중앙신문DB)
월미도 열차. (사진=중앙신문DB)

서울에서도 많이 놀러왔는데 부모님과 주위의 눈을 피해 온 젊은 남녀와 남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중년들도 사랑을 나누기 좋은 낭만의 장소로 월미도를 택했다. 특히 연인끼리 선창산업 앞길을 돌아 월미도 선착장에서 노을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를 곁들여 회 한 접시를 먹고 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연인과 손을 꼭 잡고 바닷가를 따라 군부대 앞을 지나 하인천까지 오는데 족히 4~5시간은 걸린다. 당시에는 밤 12시가 지나면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 신세를 지기 때문에 연인들은 파출소를 피해 여인숙 또는 여관을 택했다. 현재50대 이상의 인천사람이면 월미도가 남긴 나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 것이다.

월미도 전망대. (사진=중앙신문DB)
월미도 전망대. (사진=중앙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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