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세상이다. 변화를 꿈꾸고 개혁을 단행하는 세월 속을 걸으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변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변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산도 변하고 강도 변하고 하늘도 변한다. 그 가운데 사람인 우리도 변해 가는데 무얼 그렇게 변화하려고 몸부림치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여고 동창들 모임에 가면 하나같이 거짓말을 한다. ‘어머 너 그대로다, 어쩜 이렇게 안변했니?’ 몇 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아직도 열여섯 꽃 같은 얼굴일 리 없는데 우린 서로에게 이런 거짓말 같은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그 말이 아주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이제 육십이 넘은 친구의 얼굴 어디엔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니 말이다. 이젠 세파를 겪어 주름진 얼굴에 더러는 구부정한 체형인데 어디가 여고생 얼굴이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분명 그 동그랗던 눈매며 입 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던 특유의 미소나 몸짓이 우리 눈에는 금세 단발머리의 ‘그녀’로 비쳐지기만 한다.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건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 이제는 헌법재판소 자리가 된 옛 교정을 기웃거리다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곳에 있던 여고 출신이라니 경비아저씨가 기꺼이 들어오라신다. 교실이 있던 자리엔 다른 건물들이 들어선지 오래지만 작은 언덕위의 나무가 그대로다. 백송! 하얀 소나무가 그때 그대로 거기 있다. 저 나무 앞에서 교복차림의 내가 수도 없이 사진을 찍었었지. 신기한 소나무가 우리 학교에 있다고 시골 엄마에게 편지 쓸 때면 흑백사진으로 다 설명할 수 없어 하얗게 벗겨져 떨어진 나무껍질을 편지사이에 넣어 보내곤 했었지.
나는 다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수줍게 웃으면서. 주변의 옛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는데 나무 하나가 시간의 이정표처럼 나를 지나간 시절로 안내하고 있다. 나 또한 이제 옛 모습을 잃어가서 다른 사람이 되어 이곳에 왔건만 이상하게도 내 귀엔 친구들의 재잘거림과 수업 종소리가 들려온다. 나무복도를 종종거리며 걷던 소리와 선생님의 분필소리 심지어는 친구들의 사각거리는 연필소리도 들린다. 좀 있으면 도시락 몰래 여는 소리가 들릴 판이다.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는다. 바람 한 자락 내 앞을 지나갔다. 그 바람결에 내 짧은 시간여행이 후욱 날아간다.
옛날 등굣길이던 종로로 가는 길을 걸으며 옛 모습이 남아있는 장소를 찾느라 나는 분주했다. 운현궁 앞도 달라지고 낙원떡집골목도 다른 곳이 되었다. 배고파 드나들던 분식집도 떡볶이 집도 꽈배기 집도 이젠 다 사라졌다. 어디쯤 그곳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나는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차 한 대가 ‘빠앙’하고 지나간다. 지금 내가 찾아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고 전철을 타야할 곳이라고 말해주고 가는 듯하다.
돌아오는 차창 밖의 풍경도 예전엔 상상하지도 못하던 모습들이다. 이 전철이며 저 도시들이며 핸드폰을 손에 든 사람들의 모습. 어느 하나도 그대로인 게 없다.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변하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려니 하면서도 변해가는 모든 것들이 아릿하게 아파온다. 사는 것 자체가 변화이고 흘러가는 것임을 어쩌겠는가.
백송처럼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마치 아무 약속 없이도 돌아올 님을 기다리듯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잊고 살아 와보지도 못하는 나를 반기듯 서있는 나무에게서 느낀 따스함이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변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곳에 이르면 마치 어느 동굴의 오래된 벽화 속에서 시간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흘러가는 세월의 물살에서 변하면 안 되는 가치를 지닌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이나 믿음 또는 고향 같은 단어를. 그런 소중한 것들조차 ‘변화’의 물결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무수히 흔들리는 내 마음 속 어느 숲길에도 백송처럼 변하지 않고 서있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먼 훗날 행여 알아보지 못할까봐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때처럼 그렇게 서있는 나무 한그루 찾아보고 싶다. 그때 그대로, 바람에 가지 흔드는 나무를.




이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씨익 웃게되네요. 저는 이제 50대 이지만, 10년 후면 염혜순 님 처럼 지나 간 과거가 이처럼 예쁘게 그려질 까요? 이런 저런 지나감 속에 잊고 살았던 추억을 떠울리게 하는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