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덕을 말하며 ‘중용(中庸)’을 이야기했다. 흔히 중간쯤에 머무는 태도로 오해되지만, 그의 중용은 훨씬 단단한 개념이다. 그것은 타협도, 회피도 아닌 무너지지 않기 위한 판단의 기술이었다. 인간과 사회는 극단으로 기울어질수록 빠르게 붕괴한다는 그의 생각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을지라도 철학 전체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늘 묻는다. 지금의 선택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어붙이는지를.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가져야 할 균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균형은 가만히 서 있으면 저절로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다. 늘 한쪽으로 쏠리려는 힘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조정할 때 비로소 유지된다.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곧 중심을 잃는다는 뜻이다. 중심이 흔들리면 판단은 감정에 끌려가고, 감정은 선택을 단순하게 만든다. 자유는 책임과 분리되고, 권리는 의무를 앞질러 달린다. 단순해진 선택은 처음엔 편하지만, 오래 가면 반드시 사회적 피로와 갈등을 남긴다.
여자와 남자의 조화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한 사회에 여자가 극단적으로 많거나, 반대로 남자가 극단적으로 많다면 출산과 돌봄, 노동과 관계, 가족과 공동체의 구조까지 전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더 낫고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조화가 깨지는 순간, 사회는 기능을 잃는다. 이는 성장과 분배, 효율과 공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쪽만 앞세우면 다른 한쪽이 무너지고, 결국 전체가 불안정해진다. 균형은 이상이 아니라, 사회가 오래 버티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균형이 깨질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익숙하다. 사회는 흑백으로 나뉘고, 다수의 목소리가 소수를 덮는다. 변화는 속도를 잃고, 안정은 미래를 가로막는다. 감정은 앞서고 이성은 뒤처지며, 말은 넘치지만 행동은 따라오지 않는다. 타협은 배신으로 오해받고, 조정은 힘의 논리로 밀려난다. 이때부터 균형은 미덕이 아니라 짐처럼 취급된다.
요즘 우리는 의견이 다를 때, 상대를 이해하려 드는가, 아니면 이기려 드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한다. 그는 인간의 감정, 공동체의 선택, 국가의 권력이 모두 극단으로 쏠릴 때 가장 위험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붕괴 직전에 붙잡아야 할 지점이었다. 지금 우리의 사회와 정치도 다르지 않다. 정치가 균형을 잃으면 사회는 그 기울기를 그대로 배운다. 그 결과는 국민의 생각 속에도 서서히 스며든다. 그래서 지금은 한 번쯤 멈춰 서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균형 위에 서 있는가. 균형은 절대적으로 타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붙잡는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겼다고 판단하지 말고, 승리했다고도 자만하지 말고 뒤돌아볼 여유를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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