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世上萬事(18)] 성탄절

김광섭 기자
성탄절을 보름 앞둔 11일 오전 10시46분께 여주시 세종대왕면의 한 음식점 내부에 금빛 장식과 붉은 리본으로 한껏 멋을 낸 미니 크리스마스트리가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작은 연말분위기를 선사하고 있다. (사진=김광섭 기자)
성탄절을 보름 앞둔 11일 오전 10시46분께 여주시 세종대왕면의 한 음식점 내부에 금빛 장식과 붉은 리본으로 한껏 멋을 낸 미니 크리스마스트리가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작은 연말분위기를 선사한다. (사진=중앙신문DB)

성탄절이 다가오면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크게 들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는 날이다. 달력 속 12월25일은 해마다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날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케이크를 떠올리고, 사람을 떠올리고, 예전의 나를 잠깐 불러내게 만드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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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성탄절 밤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서울 어느 사람 많던 거리를 쐐 다니던 기억이다. 추운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걷던 날이었다. 목적은 없었고 약속도 느슨했지만 괜히 즐거웠다.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졌고, 그날은 그냥 즐거워도 되는 날 같았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렸던 해도 있었다. 눈을 맞으며 웃고 떠들던 장면은 지금도 또렷하다. 이유를 묻지 않았고, 설명이 필요 없던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 중 지금은 모두를 만날 수는 없다. 각자의 삶이 달라졌고, 어떤 이름은 연락처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그들은 기억 속에 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문득 떠오르고, 안부를 묻고 싶은 얼굴로 마음속에 앉아 있다. 만나지 못해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은 헛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이 날을 부르는 이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성탄절’이었고, 요즘은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성탄절이 예수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품은 이름이라면, 크리스마스는 그 의미가 문화로 풀려 나온 이름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12월25일은 종교의 절기라기보다 연말의 분위기를 나누는 날로 받아들여진다.

거리에서 캐럴을 듣기 어려워진 것도 그런 변화의 한 장면이다. 오래전부터 저작권 문제로 음악을 틀기 어렵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노래가 사라진 자리에 광고가 들어섰고, 성탄절은 점점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의 문화가 됐다. 하지만 이 날이 완전히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케이크를 사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케이크는 생일의 상징이다. 태어남을 축하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성탄절에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자연스럽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니까. 종교를 믿지 않아도 우리는 ‘탄생’이라는 말 앞에서는 관대해진다. 그래서 성탄절의 케이크는 신앙의 고백이라기보다, 존재와 시작을 축하하는 생활의 언어로 남아 있다.

지금의 성탄절은 더 이상 거리에서 밤새 걷는 날은 아니다. 대신 전화기를 든다. 그때 함께 웃고 걸었던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성탄절은 그렇게 걷는 날에서 기억을 건네는 날로 바뀌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경쟁사회 속에서 우리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 날만큼은 사람을 떠올려도 괜찮다는 묵인 같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성탄절은 무엇을 믿느냐를 묻는 날이 아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왔느냐를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눈 맞으며 웃던 밤과 이유 없이 즐거웠던 시절, 함께 걷던 사람들의 얼굴이 지금의 우리를 잠깐 멈춰 세운다. 모두 다시 만날 수는 없어도, 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고, 그 기억이 지금의 하루를 조금 덜 팍팍하게 만든다. 캐럴이 없어도, 눈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케이크 한 조각과 안부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하다. 성탄절은 그렇게 우리가 한때 충분히 행복했음을, 그리고 그 기억 덕분에 오늘도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음을 조용히 확인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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