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두물머리] 벤츠 '마이바흐(Maybach)' 차주의 품격

오기춘 기자
오기춘 기자
오기춘 국장

12월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항상 구세군 종소리와 어려운 이웃 돕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다. 그럴 때마다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난다. 약 30여 년 전, 서울 평창동에 살던 때의 내용이다. 평창동은 대부분 조용한 고급 주택가가 밀집돼 있다. 그리고 맑은 공기와 차분한 사람들의 여유 있는 생활이 어우러져 도시 속에서 편안한 전원주택을 느끼곤 한다. 그날 나는 언덕길을 걸어 내려와 마트에 가던 중 행단 보도 앞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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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내 앞에서 작은 접촉 사고가 났다. 경차인 티코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해 있던 고급 승용차의 범퍼를 미끄러지면서 살짝 받은 것이다. 범퍼에 부딪히는 소리는 미미했지만, 순간 보는 내가 긴장했다. 그 차량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느껴지는 벤츠사의 Maybach였다. 티코 차량 운전자는 사고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차에서 내려섰다. 당시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극소수의 차량이었다.

마이바흐는 1920-40년대 까지 생산된 차가 모두 1800여 대 정도로 희귀 고급 차량으로 알려져 있고, 1921년부터 독일에서 수공예로 만들어 판매한 소수의 초호화 자동차다. 그러한 자동차를 티코 차량이 받았으니 그 차 기사님은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마이바흐 운전기사 방향으로 달려가 “죄송합니다”를 반복했지만, 당황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고급차를 망가뜨렸다는 부담과, 혹시라도 크게 책임을 져야 할까 두려움이 쏟아져 나온 모습이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마이바흐의 운전기사가 내렸다. 그는 뒤 범퍼를 살펴보더니, 작게 긁힌 자국을 확인하고는 차 안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며, 그 안에서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윗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듯한 자세와 위엄 있는 눈빛, 그리고 내가 본 느낌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품격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운전기사는 공손히 상황을 설명했다. 티코 운전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장면이 이어졌다. 뒷좌석의 윗분은 조용히 손짓하며 말없이 '그냥 가자'라고 표시했다. 마치 '이 정도 일로 누군가를 어렵게 만들 필요 없다'는 듯한,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그는 창문을 올리며 당황한 티코 운전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는 상대를 향한 배려와 자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넉넉함이 동시에 담겨 있어 보였다. 운전기사는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티코 운전자에게 “괜찮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짧게 말했다. 그 순간 티코 운전자의 긴장이 눈에 띄게 풀렸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했다. 눈가에는 안도감이 번졌고, 마치 큰 빚을 탕감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이바흐는 부드럽게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그 차량의 품격을 그대로 보여주듯. 사고는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 끝났지만, 그 장면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세상은 종종 힘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또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짜 품격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벤츠사에서 나온 마이바흐가 흔하지 않은 차량으로 지나는 것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은 생활수준이 높아져 운전을 하다 보면 자주 눈에 뜨인다. 2024년 11월 마이바흐가 국내 누적 1만 대를 돌파했다는 공식 발표도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운전 모습에서는 예전처럼 여유 있는 태도를 보기 어렵다. ‘마이바흐’ 차량의 오너드라이버들도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외제차 특약 보험으로 사고가 나면 보험사에서 사고 처리를 하게 되면서 안 좋은 장면을 많이 보게 돼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당시의 그 장면은 마이바흐 차주에게는 작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 사고 앞에서, 마이바흐의 주인은 상대를 책망하지도, 운전자의 실수를 크게 만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가 보여준 것은 넉넉한 이해와 배려였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장면이 단순한 선의의 행동을 넘어 하나의 품격을 보았기 때문이다.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닌, 마음의 배려가 만드는 고귀함. 누구에게나 있을 수는 없지만,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인간미. 그날 본 평창동의 언덕길 아래 횡단보도에서 목격한 마이바흐의 품격은, 내게 있어 오래도록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아무리 많아져도, 진정한 품격은 상대를 배려하는 작은 행동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그 품격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편안하게 만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이맘때가 되면 30년이 지난 지금도, 티코 운전자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모습과, 그를 조용히 보내주던 마이바흐 차주의 품격과 배려심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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