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의 인생을 바꾼 사건

중앙신문 기자
복지팀장 이강준
복지팀장 이강준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는 주인공 브루스 웨인의 집사이자 정신적 멘토인 알프레드가 나온다. 그는 세심하고 책임감 있는 집사로, 언제나 브루스를 챙긴다. 하지만 무너지는 집의 기둥에 깔려 포기하려는 브루스에게 “평소에 운동은 뭐하러 했느냐!”라며 포기하지 말고 기둥을 밀어내 탈출하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냉철한 현실감과 단단한 믿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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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프레드의 모습이 단순한 영화 속 설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 마이클 케인 경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는 1952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를 직접 겪었다.

그는 영국 육군 로열 퓨질리어 연대 소속으로 경기도 남양주 인근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동료 4명과 함께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중공군을 향해 돌격해 포위망을 뚫고 살아 돌아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후 케인은 자서전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죽을 수도 있는 순간에 도망치지 않았던 게 내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 그때의 경험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그의 삶을 지탱한 강력한 원동력이 됐고, 훗날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배우로 자리 잡게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연기한 알프레드의 단단한 신념과 인간적인 따뜻함에는 실제로 전쟁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배어 있다.

6·25전쟁의 기억은 케인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 전 세계 21개국에서 약 195만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수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스러졌다. 그들은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낯선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걸었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은 그들의 인생과 맞바꾼 값진 선물이다. 케인처럼 용기와 신념으로 싸운 유엔참전용사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자유롭게 숨 쉬고, 꿈꾸며,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매년 11월 11일은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을 기리는 세계 유일의 국제기념일로, 이날 오전 11시가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1분간 묵념한다. 이름 그대로 ‘Turn Toward Busan(부산을 향하여)’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 2300여 명의 전몰 장병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케인과 함께 싸우다 돌아가지 못한 영국군 890여 명도 있다. 대부분은 케인처럼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다가오는 11월 11일 오전 11시, 잠시 멈춰 서서 부산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자. 우리의 오늘을 위해 낯선 땅에서 피 흘렸던 그들에게, 묵념과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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