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두물머리] '맹신'

강상준 기자
중앙고속도로 치악휴게소에서 본 ACC '맹신' 금물 홍보물. (사진=강상준 기자)

살다 보면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덮어놓고 믿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맹신(盲信)이다. 글자 그대로 눈이 멀어(盲)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믿는(信) 것이다. 종교나 이념, 미신에만 있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맹신의 함정에 빠진다. 밤늦게 컴퓨터 화면에 뜬 '지금만 노트북 무료 증정' 광고.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데, 클릭하는 순간 개인 정보와 금융 정보는 순식간에 유출된다. '설마 진짜겠지'라는 마음이 불러온 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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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니 틀림없다'는 태도, '이념만 믿으면 다 해결된다'는 환상,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일 것'이라는 성급한 확신. 이런 믿음들도 맹신이다. 남의 말만 듣고 판단을 맡기면, 상황은 곧 나를 배신한다. 요즘 세상은 기술도 믿게 만든다. AI에게 부탁하면 거의 똑같은 목소리도 내준다. 똑같은 모습의 사진도 만들어준다. 확인이 불가능한 동영상도 만들어 준다. 겉만 보고 판단하면,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가기 쉽다.

지난 휴일, 강원도 가는 길에 중앙고속도로 치악휴게소 화장실에서 한국도로공사가 홍보하는 홍보 스티커 'ACC(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맹신 금지'라는 안내문을 봤다. 그제야 '맹신'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확 들어왔다. 운전자가 원하는 속도를 유지하고 앞차와의 간격을 자동 조절해 주는 첨단 주행 보조 장치지만, 지난해 국내에서 ACC 작동 중 발생한 사고는 12건, 사망자는 11명에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 고속도로에서 정차 차량이나 공사 차량을 미인식해 추돌한 경우였다. 이 기계 장치를 믿었다가 생명까지 잃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니 '이 장치면 절대 사고 안 난다'는 믿음이, 옛말에 "남의 말만 듣고 배추 사러 간다"는 속담과 겹쳐졌다. 자기 눈과 판단 없이 남의 말만 믿고 움직이다가, 헛걸음하거나 낭패 보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예전 장터에서는 배추 작황과 가격을 직접 확인하는 게 상식이었는데, 귀동냥만 듣고 장에 갔다가 비싸고 시든 배추를 사 오거나, 심하면 배추는커녕 '무'만 들고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첨단 장치라고 다를 게 없다. ACC를 무턱대고 믿는 건, 고속도로 위에서 시든 배추를 사는 것과 같은 꼴이다. 차라리 안 사는 게 낫다.

맹신은 편하다. 판단을 맡기면 마음이 가볍다. 그러나 그 대가는 종종 안전과 재산, 심지어 목숨이다.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고, 기능의 한계를 이해하며, 늘 한 번 더 의심하는 습관.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지키는 최고의 안전장치다. 수없이 많은 변화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맹신이라는 말을 잘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찌 보면 갖고 있는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최대의 행복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며칠 전 고속도로 치악휴게소에서 본 '맹신'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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