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김기자의 가볼만한 곳] 비 오는 날 들른, 인천 을왕리 ‘을항’

김광섭 기자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간 물회집, 시원한 조망 '맛' 중정 위로 하늘이 열리고, 접시 위엔 계절이 담긴다
비 내리는 6일 낮 12시43분께 물회전문점 인천 을왕리의 을항을 찾았다. 사진은 을항 전경. (사진=남용우 선임기자)
비 내리는 6일 낮 12시43분께 물회전문점 인천 을왕리의 을항을 찾았다. 사진은 을항 전경. (사진=김광섭 기자)

[중앙신문=김광섭 기자] 을왕리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예상치 못한 ‘건축물’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건물 외관만 보면 갤러리도 아니고, 전망대도 아니다. 간판에는 ‘계절바다 물회전문점’이라 쓰여 있다. 이름부터 감각적인 이곳 3층 규모의 음식점 ‘을항’이다. 흔한 간판 하나 없이 하얀 벽면에 검은 글씨만 걸린, 완벽한 미니멀리즘 건축. 이곳은 단지 ‘맛있는 집’이 아니다. 공간으로 맛을 안내하는 식당, 먹는 것 이상의 경험을 설계한 장소다. 미술관이라 해도, 고급 카페라 해도, 누군가의 별장이라 해도 어울릴 법한 모습이다. 을왕리해수욕장에서 직선거리로 약 500미터 떨어져 있다.

미술관 같은 외관,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는 맛집

1층에 차를 대고 내리면 건물 가운데 하늘을 향해 열린 사각형 구조가 눈에 띈다. 그 중앙에는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 한 그루가 홀로 심겨 있다. 이른바 ‘중정(中庭)’, 빛과 바람을 받아들이는 고요한 중심이다. 건물 외관은 미술관처럼 간결하고 절제됐다. 직선미, 비움의 미학, 단단한 형태감. 이것이 을항의 첫인상이다.

음식점 입구에 다다르면 또 하나의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에스컬레이터가 손님을 2층으로 안내하는 구조. 식당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탄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고,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긴다.

6일 낮 12시43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른 기자와 일행들이 2층에 도착하자 “어서오세요”라는 직원의 인사가 따뜻하게 맞이한다.

전복물회와 육전.
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2, 3층 음식점이 나온다.

한 그릇의 바다, 물회에 계절을 담다

건물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지만, 이 집의 진짜 주인공은 단연 ‘물회’다. 사진 속 빨갛게 차오른 육수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해산물들. 광어, 전복 등이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살얼음육수는 새콤하고 감칠맛이 돌며, 과하지 않게 혀를 감싼다. 먹다 잠시 쉴 즈음엔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매워온다. 하지만 다시 한 숟갈, 물회를 또 먹으면 매운 기운이 사라진다. 묘한 순환. 새로운 경험이었다.

함께 나온 노란 소면은 물회와 함께 먹으면 차지고 쫄깃하다. 고명은 무순, 양배추, 양파 등으로 구성돼 있고 각각의 식감이 해산물과 어우러지며 입안을 풍성하게 채운다. 또 하나의 별미는 육전.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부친 계란 옷이 얇고 곱게 입혀져 있고, 가운데 영양부추가 얹혀 있다. 부추를 곁들여 한입 베어 물면, 부드러운 육즙과 은은한 기름맛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 외에도 굴전, 모듬전, 전복죽, 녹주전복죽, 회덮밥 등의 메뉴가 있다.

기자가 찾은 날은 마침 비가 내렸는데, 그날의 육전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단연 최고였다. 그래서 그날 이후, 비 오는 날엔 육전을 먹어야겠다는 기억을 머릿속에 새겨두게 됐다.

태블릿 주문, 로봇 서빙…경험까지 설계된 식당

실내에 들어서면 이 집의 ‘미래 지향적 서비스’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주문과 결제는 테이블 한켠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셀프 진행되고, 음식은 로봇이 조용히 테이블까지 서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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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인건비 절약을 넘어서, 사용자 경험을 정교하게 설계한 듯한 시스템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로봇에게 물회를 받는다. 이색적이고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도움이 필요하면 직원이 곧바로 도와준다.

중정 자작나무.
을항 내부 모습.

중정 아래 주차장, 작은 배려의 설계

1층은 전부 주차장으로 쓰이고, 주차요원이 상시 대기한다. 특히 중정 아래 빈 공간은 자연광을 그대로 들이면서도, 비 오는 날에도 차에서 우산 없이 내릴 수 있는 구조다. 이런 디테일이 바로 ‘을항’이라는 공간의 철학을 보여준다.

식기와 인테리어 모두 을향이라는 글씨가 새져져 있고 또한 감각적으로 꾸며져 있어, 시각적 만족감도 높다. 화장실도한 깨끗했다.

을항은 왜 기억에 남는가?

지나가다 겉모습에 끌려 들어간 ‘을항’은 단순히 맛있는 집이 아니었다. 공간, 건축, 음식, 시스템, 서비스가 모두 조화를 이루는 식당이었다. 사진 속 물회 한 그릇, 육전 한 판, 그리고 하늘을 향해 열린 건물 한가운데 자작나무 한 그루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끼’가 아닌 ‘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집이다.

날씨 맑은 날 다시 찾아간다면 어떤 인상이 남을지 궁금해진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의 을항은 그 자체로 멋진 추억이었다. 식사 후엔 인근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필수다.

인천 을왕리는?

인천 중구의 대표 해변인 을왕리해수욕장이 위치한 ‘을왕리(乙旺里)’는 이름의 유래가 독특하다.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시대 왕족과 관련 있다는 전승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왕실 제2계통, 즉 '을(乙)' 계열의 왕족 중 한 인물이 이 지역에서 생을 마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을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확한 인물이나 문헌상 근거는 부족하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오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이 지역의 지형이 왕관을 닮았거나, 풍수적으로 ‘왕이 될 기운(旺)’이 있는 ‘을’ 방향의 땅이라는 상징에서 비롯됐다는 민속적 설도 있다. 한편으로는, 옛 행정구역 구분인 ‘갑(甲)·을(乙)’과, 번영을 기원하는 ‘왕(旺)’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는 실용적 해석도 있다.

을왕리에는 ‘을왕묘’로 불리는 고분 유적도 있으며, 이 무덤이 왕족과 연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을왕리는 단순한 해수욕장 그 이상, 이름 속에 미스터리를 품은 채 바다와 함께 시간을 견디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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